사랑과 폭력 사이

미움과 용서의 기로에 머뭇대는 우리에게

by 은정

세월이 지나도 기억나는 아픔에는

사랑이란 이름도 있었고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이 있었고

그냥 폭력인데 사랑이라 우긴 일들도

같은 색깔인양 뒤섞여있어.


어린 시절부터, 업어 키우다시피 했던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자식들을 버리라 했고

어린 세 손주들이 듣는 걸 알았을 텐데

딸을 사랑한 엄마라고 생각했나 봐


우리를 선택한 엄마의 이른 죽음은

어린아이들이 가슴에 깊이 박혀

엄마의 인생을 빼앗은 죄책감으로 자랐지


상처로 받은 말들은

뿌리를 내리나 봐

딸만 낳는다고 구박받던

외할머니는 20대에 이미 병들었었고


모진 말을 듣고 견뎌온 외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숱하게 아픈 말로

사랑을 표현했고


외할머니의 딸들은 늙은 노모를

돌보지 않을 만큼 상처의 나무가

깊게 뿌리를 내렸어


엄마를 보내던 날

우리를 돌보겠다고 약속한 외할머니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어울리지 않는 노력을 많이도 하셨지


그때부터였어.

무서운 외할머니가

그냥 모진 세월을 견뎌온

가엾은 한 여인으로 보인 것이.


역사소설에나 나올법한

그러한 인생의 여성.


총명한 여자애는 배우지 못하고

일본이름으로 불리고

강제로 시집을 가서

어린 자식들을 새끼줄로 묶고

시체를 건너 피난길을 겪고


아들을 낳기 위해

여덟 번의 출산과

자식을 먼저 보내는 두 번의 이별


사랑을 잘 배우지 못한 소녀는

모든 가능성을 시대에 빼앗겨

아이만 낳고, 아들에 집착하다

딸도 아들도 마음은 놓쳐버렸어.


외롭게 남은 인생

한 번도 칭찬하지 않은

며느리만이 마지막까지 씻겨주고

이별을 준비해 주었지.


미안하다 자식들 아라고 화해도 못하고,

사랑이 서툴렀다 변명도 못하고,

자식들은 가슴에 못을 다 빼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가시던 날


외할머니랑 가장 오래 산 나,

모진소리, 회초리, 눈빛에

덜덜 떨며 자랐던 나는...

소리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어.


외할머니를 잃은 슬픔보다

90년 인생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그렇게 세월에 총명도, 미모도 빼앗긴

모든 걸 주고도 자식사랑에 실패한 여성


그 여인이 가여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


사랑은 따뜻하게 표현돼야 사랑이지.

아프더라도 받는 이가 사랑인걸

가슴깊이 느껴야 사랑이지.


생존이 최상의 사랑이었던

일제강점기, 전쟁, IMF

살아내고 살아왔고 잘 이겨낸

그 여인에게~


적어도, 나 하나쯤은


폭력에 가려진 사랑을,

사랑이라 믿고 행해진 폭력을

당신의 서툰 사랑이었다고

용서하고 고맙다고 말해볼까.


그리고

손녀딸은, 이 땅에 많은 손녀딸들은

당신과 다르게 사랑하며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마무리 인사를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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