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소설 <환상의 빛>
우선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밝히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다.
위 글을 쓰던 당시보다 마음의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는 것. 저 글을 쓰던 때 깊은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면 지금은 다시 올라가기 위한 마음의 틈이 생겼다. 불과 며칠 전인데 말이다. 우울한 상태가 만성적으로 지속되기 전에 비교적 빠르게 상태를 자각하고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를 참아내기 힘든 불면의 밤에 수면제를 털어 넣는 대신 두서없지만 글을 써서 띄웠고, 그 글에 응답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게 끝이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다.
@여산 님, @이진민 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더불어 이 글을 쓰는 지금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우울한 감정을 전염시키지 않는 것이다. 말, 글, 음악, 그림 등 여러 형태로 표현된 감정은 전염될 수 있다. 공감의 조금 다른 형태가 전염일 것이다. 공감은 힘이 되지만 너무 깊은 공감으로 인해 우울한 감정이 누군가에게 전염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우울증이 무엇인지 어떤 상태인지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우울증에 빠졌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다. 지금 내 상태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하자 어떤 형태로든 빠르게 SOS를 칠 수 있었다. 우울증을 자각하고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나보다 먼저 우울증에 대해 고백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우울증에 빠진 상태가 내게 깊이 각인된 본질이나 앞으로도 지속될 모습이 아니라고 믿을 수 있었다. 이 글도 그중 하나가 되길 바란다.
내가 우울증임을 자각한 첫 번째 신호는 "극도로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침대 밖에는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소소한 집안일부터 나를 평소에 즐겁게 해 주던 취미 활동, 그리고 먹고살기 위한 일터까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었던 일들이 수두룩 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무엇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숨만 쉬는 것조차도 버겁게 느껴졌다.
분명 그전에 하고 싶고 행복감을 주던 행위조차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매우 낯설고 무섭게 다가왔다. 나는 평소에 기분 전환을 매우 쉽게 하는 편이었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고 손을 깨끗이 씻고 좋아하는 글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잠깐의 순간이 특별하고 의미 있게 여겨졌다. 그런데 내 생활을 의미로 채우고자 하는 행위마저 의미가 없게 여겨지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당장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이런 내가 너무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데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 나오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 이 영화에는 어찌 보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이상한 인물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인물이 바로 집 안에 틀어 박혀 어디도 나가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기만 하는 엄마였다. 심지어 모든 생활을 1층 거실 소파에서만 한다. 2층에 있는 본인의 침실에 조차 언제 마지막으로 올라갔는지 알 수 없다. 하루 종일 그 소파에 앉아 먹고 마시고 tv 보고 잠을 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남편이 지하실에서 자살을 한 이후로 그렇게 되었다.
그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모습이 바로 지금 내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영화 속 그녀는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 이전에 자살을 한 아빠 역시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아빠. 그의 죽음 이후 가족들 역시 다 조금씩 아픈 삶을 살고 있다.
주인공 길버트 그레이프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고 겨우겨우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 아프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주변 사람들, 가족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을 뿐이다. 앞선 글에서 썼듯이 나 역시 지금 내가 존재해야 하는 내 안의 이유를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다. 단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뿐. 길버트와 달리 내 주변 사람들이 내게 의존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 속에 있는 나를 떠나, 오직 나를 위해 꼭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갉아먹는가?”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를 둘러싼 현실과 가족들이 그를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반만 진실이다. 그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질문을 하지 못하는 길버트 그레이프 자신 역시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실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 자신을 아는 것만큼 어려운 질문은 없다. 평생을 가도 못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질문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 자신의 영혼은 조금씩 좀먹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용기나 기운조차 없을 때 삶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속 가족들은 아버지의 자살 이후 조금씩 다 어딘가 비어있는 삶을 살고 있다. 애초에 아버지가 왜 자살을 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가 그려질 뿐.
이와 비슷한 소설이 있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아이와 자신을 두고 자살을 한 아내가 화자로 등장한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아 알 수 없는 남편의 죽음. 무엇이 그를 기차로 몸을 던지게 했는지 남겨진 이들은 알 수 없다. 영원히 알 수 없지만 그 이후의 삶을 이어나간다. 그 일은 분명 남겨진 이들에게 상흔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이들은 살아간다. 어쩌면 왜 사는지에 대한 거창한 이유나 확고한 대답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왜 사냐건 웃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기억하는 건, 그 웃음에 담긴 초탈한 듯한 삶의 태도에 대한 감탄과 함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질문에 중요한 건 답이 아니다.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당장 찾을 수 없을지라도 계속해서 질문하고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바라봐야 한다. 깊은 어둠에 갇혔을 때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 만으로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이때 필요한 건 답이 아니다. 당장 답을 찾을 수 없어도 괜찮다고, 지금 당장은 답이 내 안에 없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게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억지로라도 믿어야 한다.
우울에 빠졌을 때 나를 갉아먹는 건 그 순간 답이 없다는, 앞으로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기력이었다. 더이상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내 말과 글에 반응해 준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