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하게 언어화할 수 없기 때문에 신체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우리말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예전엔 말조차 생소했던 PTSD는 최근에는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겪는 정신적, 신체적 증상을 말한다. 트라우마가 되는 특정 사건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플래시백부터 불면증, 갑작스러운 불안감, 약물 의존, 발작 등 사람마다 다양한 증상을 겪는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 역시 사건 후, PTSD로 고통을 받는다. 1995년에는 PTSD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서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더그라운드>에 실린 사린 사건 피해자 인터뷰를 보면 사건 후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증상들이 있다. 예전보다 쉽게 피로해지며 잠을 푹 자지 못하고 악몽을 꾼다. 물론 사건의 기억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삶에 집중하려 의지를 다지고 노력을 하지만 사건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지는 못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요즘 들어 갑자기 모든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314p
꿈을 자주 꿉니다. 사건 직후엔 별로 꾸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서 자주 꿔요. 그때의 정경이 그대로 꿈속에 나타납니다. 저는 그 정경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다 눈을 뜹니다. 한밤중이죠. 그럴 때는 정말 두렵습니다. (...) 그러나 제가 겪었던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는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지만......
같은 책, 330p
사건 후, 얼마간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 졌습니다. 허탈감 탓이라고 생각해요. (...) 그때는 '이제 소중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어'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긴 분재도 사람들에게 모두 줘버릴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책, 573p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 외에도 피해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한 정신과 의사도 인터뷰했다. 그 의사는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말하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은 오히려 적절한 치료를 받기 때문에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들을 치료하는 첫 번째 방법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피해자들 역시 사건의 기억을 억누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을 하면서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면 오히려 다른 증상들로 고통을 겪게 된다고.
적절하게 언어화할 수 없기 때문에 신체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특히 사린 사건의 경우, 그전에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을 겪은 사람들도 당시의 공포를 언어화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자신의 느낌을 언어로 바꾸는, 의식화하는 회로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자기 안에서 그 기억을 억누르고 그러다 보면 신체가 반응을 한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 고통과 싸우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에너지가 줄어들고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같은 책 118p, 재구성)
억누르는 대신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고 고통스러운 감정과 상태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PTSD 치료는 시작한다.
"언어화"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힘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어 두렵기만 한 것을 언어를 통해 정박시키고 나면 그것을 한걸음 뒤에서 살펴보고 그곳에 놓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 이것은 객관화와는 다를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한다고 해서 그 고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더 고유해지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 심지어 같은 사건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100% 공감하지 못하는 고유한 고통과 괴로움. 이것을 무정형의 상태로 안에 심어 두고 억누르지 말고 언어를 통해 밖으로 끄집어 냄으로써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다. 안에 있을 때는 스스로도 알지 못해 무섭고 피하고만 싶었던 것에 불완전하게나마 실체를 부여하여 자신에게서 분리하고 나아가는 것. 이게 언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인터뷰를 할 때 단순히 그들을 피해자라는 틀 안에 넣고 대상화하거나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고 한다. 이 태도의 차이는 매우 큰 것이다. 이 인터뷰가 그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한 사람은 이렇게 인터뷰를 끝맺는다.
부모님은 이 인터뷰를 받아들이는 걸 반대하시더군요. 이제 겨우 잊어버리려 하는데 다시 기억을 더듬으면 좋지 않다고 말이죠. 그러나 이 기회를 하나의 경계선으로 삼아보자고 생각했어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330p
제대로 언어화하지 못한 고통은 신체화되어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 이 책에 실린 사린 사건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그 사건을 다시 마주한 만큼, 그 이후 그들의 삶이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