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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Aug 20. 2024

루바토

"나무를 보면 뿌리와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지는 않지만, 나뭇잎은 바람에 따라 자유롭게 흔들린다. 루바토는 흔들리는 나뭇잎과도 같다. 근본을 해치지 않는 자유로운 연주가 루바토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JTBC '고전적 하루'중에서, 리스트의 말을 인용하며-)


루바토를 스포츠에 적용하면 다음 두 가지 분류가 나올듯하다. 하나는 심판의 주관적 편향성이 독이 될 수 있지만 아트성향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이끌 중요한 판정을 동반하는 심판종목과 또 하나는 명명백백하게 객관적 성적으로만 메달을 수여하는 기록종목이 그것이다.


그럼 피아노 콩쿠르는 굳이 비유하자면 심판분야이다. 판정은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점수를 획득하는 면에서 보면 진취적인 도전의식은 퇴보되나 안정적이면서도 공정한 판정은 보장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예술분야의 콩쿠르에서 루바토는 모험일 듯하다.


피아니스트에게 루바토는 단지 피아노 곡해석에만 부여하지 않고 그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라는 장대한 목표의식을 고취하지만, 인간은 한계가 있기에 과도한 경쟁은 예술을 망치기도 한다. 그래서 피아니스트에겐 콩쿠르가 애당초 상극일지 모른다.


현실로 눈을 돌리면 객관성, 공정성을 기반으로 한 AI 기술은 삶의 루바토를 허용하지 않는다. 피아니스트의 피아노가 객체이듯 각자 개별적 삶의 주체는 삶이라는 객체를 얼마만큼 주도 있게 이끌고 가야 하는 것은 삶의 주체인 각자의 능력이다.


과연 루바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 또한 딜레마적 모순 화두이다. 피아노처럼 문학 또한 작가의 루바토 터전이다. 작가가 글을 쥐락펴락하며 독자를 벼랑까지 몰고 갈 수 있는 필력과 스토리텔링 그리고 거기에 예술적 루바토까지 발휘한다면 훌륭한 글이 된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모든 행위는 삶의 근원적 행위에 기반을 둔다. 다만 삶은 생존에 무게가 버거울 뿐 낭만에 무게는 한없이 가볍다. 그렇다면 삶의 루바토 무게의 초점은 삶의 의미를 되새길지, 아니면 생존의 비결에 힘을 쓸지는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균형과 조화라는 루바토의 이상을 논하기 전, 기교를 부리기엔  퇴색되고 낭만을 추구하기엔 식상하다. 과연 삶의 루바토를 각자의 색깔의 자생적 바탕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선 그저 그냥 삶의 최선만 부르짖기가 힘겨운 것은 인간의 숨결이 애틋하고 고상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아노의 선율이 그토록 아름답게 들리는가 보다. 그것도 기계적 기교가 아닌 자신만의 해석으로 연주하고 근간을 흔들지 않는 범주 내에서 자신만의 음률을 만드는 루바토의 선율은 감동을 준다. 루바토는 예측하기 힘들기에 메마름에 단비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언어적 장치와 그 파생물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면서도 이 차단막에 의지해서 세상을 이해하려 했는데, 이 가려짐은 삶의 전 범위를 포위하고 있어서 부자유가 아늑하고 친숙했다" (-허송세월 중에서, 김훈)


삶의 공정력은 기계에 의존하면서도 문학과 예술의 루바토를 갈구하는 이유의 속내는 나도 모르겠다. 단지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틀이 숨 막히는 것인지, 아늑한 것인지도 그때마다 다르다. 지금 현재 김훈작가의 말처럼 나는 갇혀있다.


나 자신의 틀에 갇혀있고, 햇볕이 주는 자양분을 가로막는 차단막에 갇혀있고, 가보지 않은 길을 가지 않는 익숙함에 갇혀있고, 갈증의 목마름에 갇혀있다. 또한 혼자 풀지 못한 문제는 영원히 혼자 풀지 못하지만 끝까지 풀어야 한다는 신념에 갇혀있다.


갇혀있는 자들의 해방이란 무엇인가? 진심과 신념을 파괴시키지 않으면서도 갇혀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마음을 들게 하는 그런 깨달음! 갇혀있지만 따스하게 아늑하지만 갇혀있어 싸늘하게 아득한 이중적 혼돈의 흔들리는 감정에 지렛대가 되어주는 믿음! 그것이 루바토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나는 루바토를 절대적으로 의지하지는 않으리라 항변한다. 피아니스트가 아니어서 아니면 삶의 조율사가 못되어서 그런가 보다. 그렇지만 갇혀있어 속았다고만 한탄하지만은 않겠다고 다짐한다. 단지 나를 속이지는 않았음 한다. 나의 루바토는 내가 찾을 것이다.


삶은 허송세월하면서 자기 생의 바닥을 보여주기도 한다. 허송세월 한 만큼 알아들었으니 이제 안 속겠다는 말보다 속이지는 말라라고 주장한다. 루바토는 삶의 진실 속에서 자생되는 것이지 그렇게 인위적인 자작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히 갇혀있지만 루바토의 해방을 갈구하고 있으니 나는 그 누구의 관여를 거부하고 나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이제 끝이 아닌 다시 시작이다. 새로운 루바토를 향해서 새로운 끝과 시작을 새롭게 해석하는 그날들과 동반하여 삶을 지속하여 전진할 뿐이다.


- 2024년 8월 나뭇잎이 흔들리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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