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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바오 May 27. 2024

부모의 재산이 자식에게 가면...

어느덧 여기까지...

내 기억으로는 5~6살 정도의 나이로 기억한다. 강원도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내가 3살 즈음 서울 할머니댁으로 이사를 왔고 2~3년 살게 되었다. 같이 사는 동안 몆 번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할머니는 아버지와 나를 데리고 건축현장을 방문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큰 공사장에 깊은 땅을 파놓은 장면만이 뚜렷이 기억난다. 왜 그곳에 갔는지 기억은 없다. 흙과 철근이 널브러져 있는 이곳에 무언가 세워지나 보다 했다. 공사현장을 보고 있던 내게 할머니께서는 이곳에 아파트가 지어지면 살게 될 것이란 말을 하셨었다. 몇 년 후 아버지, 어머니, 동생 이렇게 우리 식구는 새로 지어진 12층 높이의 30평대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다.


70년대 후 반 80년대 초 강남은 교육과 부의 상징이 되기 시작하였다. 도시계획하에 개발되는 강남은 유명 중고등학교가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을 하고 백화점이 들어섰다. 오래된 강북의 도로와 달리 바둑판식 도로가 넓고 길게 포장되었다. 유명 전통학교들이 이전을 하면서 8 학군이라는 학교는 서열화되었다. 돈 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자식 공부 잘 시키기 위해 이사를 하였고 여의치 않으면 위장전입까지 하곤 했다. 그때부터 강남은 교육과 부의 상징이 되었다.


매 달 생활비는 할머니의 주머니에서 충당되었다. 강원도에서 올라온 우리 가족은 서울생활이나 물가도 몰랐다.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재력이 되니 우리 가족을 올라오라고 한 것이었다. 강원도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때도 할머니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직장을 다니지 않았고 하는 사업이 모두 실패를 했기 때문에 고정된 생활비가 없었다고 했다. 생활비를 대주는 것이 당연하듯 할머니는 매달 보내왔고 서울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우리 집의 크기는 33평, 20평, 18평, 10평으로 줄어들었다. 국민학교 3학년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우리 집 짐들이 아파트 앞에 모두 나와있었다. 왜 우리 짐들이 밖에 나와 있는지 어머니께 물어보니 이사를 간다고 하셨다.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왜 이사를 가는지, 어디로 이사를 가는지. 어머니의 한숨과 표정에 쓰여 있었다. 이틀에 한 번 직장생활을 하던 아버지의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할머니의 생활비가 아니면 생활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주시던 생활비가 끊긴 것이다. 할 수 없이 집을 줄여야 했고, 그때부터 우리 집의 평수는 점점 줄어들어 10평 전세에 살 지경까지 이르렀다.


우리 집은 돈 걱정 없이 잘 살고 아버지의 벌이가 괜찮은 줄 알았던 내가 실상을 알게 된 시점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현실을 깨달은 것일까. 어머니는 가만히 있지 않고 돈이 되는 일이면 나가서 일을 하셨다. 부모님의 싸움이 잦아지고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길가에 누워 계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부축해서 집으로 데리고 와야 했다. 아버지의 신세한탄과 자격지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가끔 할머니를 보러 가는 날이면 아버지는 가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주머니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줄 알았던 것인가. 아버지는 결혼 전 여러 사업에 실패를 해도 그때마다 할머니는 사업자금은 물론 생활비까지 주셨다. 그 버릇은 결혼 후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서도 계속되었다. 집을 사주고 생활비를 주셨던 할머니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더 이상 금전적인 지원은 없었다. 할머니회사는 부도가 났으며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쫓기는 신세까지 되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더 이상 없었다.


그 후로 할머니는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가셨다. 아들 둘을 둔 할머니는 죄인이었다. 할머니가 손주를 보러 가끔 오실 때면 좌불안석이었다. 아버지의 할머니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뭐가 문제일까. 이제 더 이상 생활비를 주지 않고 힘들게 살게 된 것이 할머니 탓 인가. 아니 할머니 잘못으로 해야 속이 시원했던 것인가. 할머니도 잘한 것은 없지만 이제서라도 제 식구 먹여 살릴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할머니를 대하는 모습도 싫었고 할머니는 자식 눈치를 보며 손주를 보러 오는 모습도 싫었다.  


요즘 나는 당시의 할머니와 아버지 생각이 문득 나면서 내 자식에게는 잘하고 있는지. 남의 자식 귀한 줄 모르고 내 자식만 감싸는지 아니면 분에 넘치게 주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 부부는 아직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사 주지 않았다. 중1, 초4, 초2 학생들에게 핸드폰이 없는 친구를 찾기가 더 어렵다. 며칠 전 큰 아이가 학교에서 현장학습이라며 단체로 놀이공원을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모두들 사진을 찍고 검색을 해가며 삼삼오오 모여 놀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공유하며 시간을 보내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와서 아내에게 조용히 그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다 좋았는데 그 시간은 견디기 힘들었다고. 아내는 큰애에게 '그래 그 시간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엄마가 핸드폰 사주는 게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닌 건 너도 알지? 지금이라도 사 줄 수 있는데 핸드폰을 사고 나서 어떨지 네가 한 번 생각해 보고 알려줘. 그래도 필요하면 사줄게'라고 하였다고 한다. 다시 생각한 큰 아이는 '아직은 괜찮다'라고 하였다. 대신 현장학습이나 놀러 갈 때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공기계를 달라고 하였다. 


최소한 자식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할 수 있게 키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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