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여기까지...
지금도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12년 전 초 여름이었다. 토요일 회사에서 급한 업무를 보고 집에 오니 오후가 되었다. 아내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고 출산을 세 달 정도 앞두고 있었다. 집에 와서 간단히 씻고 소파에 앉았는데 나무토막이 넘어가듯 옆으로 쓰러졌다. 몇 분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호흡을 몰아 쉬면서 눈을 떴다. 식은땀은 온몸에 흘러내렸고 몸이 몹시 떨렸다. 아내와 첫째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랬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괜찮다며 땀을 닦았다.
처음 겪어보는 증상이었다. 너무 피곤했었나 조금 쉬면 괜찮아 질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건강하나는 자부하고 살아왔는데 이게 뭐람. 속상한 생각도 들었다. 괜찮겠지 라며 식사를 하고 평소처럼 저녁을 보냈다. 잠이 들 때까지 석연치 않은 생각이 계속 들었다.
다음날 옆동에 살고 계시는 어머니께서 초복이라고 삼계탕을 사 주시겠다며 점심을 먹자고 하셨다. 우리 세 식구는 집 근처 식당으로 가서 어머니를 만났고 주문을 하였다. 삼계탕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몸이 이상했다. 시야가 좁아지고 쓰러질 것 같았다. 결국 식사를 하지 못하고 식당의자에서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지만 식당의 손님들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고 나를 부축했던 어머니는 정신 차린 나를 일으켜 세워서 식당을 나왔다.
어제오늘 두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병원을 가봐야 했다. 만삭인 아내는 첫째를 데리고 집으로 갔고 어머니와 근처 대학병원으로 갔다. 응급실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잠시 누워 있는데 담당의사가 몇 가지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해서 입원하기로 했다. 평소 질환이 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아픈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더 답답했다. 왜 두 번씩이나 의식을 잃었는지.
몇 달 있으면 둘째가 태어나는데 내가 지금 병원에 누워서 뭐 하고 있나. 임신한 아내, 이제 4살인 첫째를 생각하니 더 심난했다. 왜 내 몸이 이런 건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신을 잃었는지 원인을 찾아야 했다. 병원에 왔으니 병명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천장을 응시하며 검사를 기다렸다.
혈액검사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기본적인 검사를 마치고 실신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24시간 심장박동 체크 장비를 차고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심장박동 검사, 약물 투여 후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한 뒤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지 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이상 없다'였다. 더 이상 병원에서는 해줄 게 없는 듯하여 어머니와 집으로 왔다. 허탈했고 걱정되었다. 원인을 찾아서 고쳐야 하는데 병명이 없다는 것이 더 걱정되었다. 언제 어디서 또 쓰러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퇴원을 하고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있는데 이번에는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100미터 달리기라도 한 듯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5분 10분 가슴을 움켜쥐고 있으니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상하다. 또 다른 증상이었다. 실신과 심장의 두근거림. 차라리 어디를 다쳤으면 외과적인 치료를 하면 되지만 알 수 없는 증상과 병원에서 병명에 대한 결과도 정확하지 않은 상황이 더욱 혼란스럽게 했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무슨 치료를 받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일상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과 불안이 엄습해 왔다. 그러던 중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지금 증상에 대해 물어봐서 모두 얘기해 주었다. 신경정신과를 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였다. 동생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 도 있겠다 싶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실신과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가라앉았다 하는 증상은 신경문제 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정신 개인병원을 방문하였다. 집을 나설 채비를 하고 나가는데 한 걸음 하기도 힘들었다. 마치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간신히 병원을 방문하여 상담을 한 결과 '공황증상'이라고 하였다. 공황장애는 여러 가지 증상이 있는데 나 같은 경우 불안증이 과도하여 생긴 증상이라고 하였다. 나의 신상의 문제, 나의 주변의 문제등 실제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해 과도한 걱정과 그로 인한 불안증상으로 너무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그러다 신경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이다. 병원에서 신경과 약을 처방받고 그런대로 진정이 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어려서는 부모님 문제로 불안했고 결혼하고 아기를 갖기 위해 세 번의 유산으로 늘 불안했다. 아이를 갖고 나서는 육아문제로 건강이 성치 않았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맞벌이를 해야 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불안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 상황을 슬기롭게 넘기지 못 한 내 문제라고 본다. 비록 그 이후로는 약에 의지해서 살게 되었지만..
비록 내 몸이 바닥을 쳤지만 나에게는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만삭인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일어나야 했다. 약을 먹고 좋아졌지만 다시 일어나야 할 그 이유가 아니었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것 같다. 누구나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편, 아내, 부모, 자식의 이유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며, 그 끈을 놓지 못하고 버티고 살아간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정신과 몸이 온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