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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바오 May 20. 2024

어머니의 수술 그리고... 이혼

어느덧 여기까지...

무서움, 불편함, 화가 치밀어 오름은 학생이었던 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었다. 어려서는 무서움에 가까지 가지 못 했었고 커가면서 그런 아버지가 불편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화가 났던 기억이 전부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항상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못 했다. 어머니와 다툼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 형제는 방에서 숨죽이며 있어야 했다. 싸움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결국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순탄하지 못했던 사업으로 매일 술에 의지하였고 그 원인은 애꿎은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그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고 화를 참지 못 할 때면 멀쩡한 자전거나 우편함을 부수는 것으로 풀었다.


어머니가 불쌍했다. 매일 숨죽이며 사는 것은 물론 생활비가 부족해서 식당이며 가정부일을 하며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회사와 사업에 실패한 그에게 밥을 해주면서도 온갖 싫은 소리는 모두 들어야 했다. 밥상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상을 엎은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매일매일이 지옥이었다. 어쩌다 그가 기분이 좋으면 언제 또 괴팍한 행동이나 말을 할지 걱정되었다. 그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머니를 보면 볼수록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집에서는 그의 눈치를 보고 우리 형제를 달랬고, 집 밖에서는 틈틈이 돈을 벌었던 어머니는 어느 날부턴가 몇 계단 오르지 못하고 숨이 차서 몇 번을 쉬었다 가야 했다. 증상은 점점 심해져서 누워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도 걱정이 되었던 건지 아니면 밥 차려줄 사람이 아픈 게 싫었는지 병원을 가 보기로 하였다.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심장판막폐쇄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처음 듣고는 무슨 병인지도 몰랐다. 의사 선생님은 심장에서 우리 몸에 피를 밀어주고 받고 하는 판막에 구멍이 나서 제역활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였다. 수술 외의 치료는 어렵다는 소견이었다. 수술을 한다면 가슴을 열고 심장 안의 판막을 교체해야 했다. 심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그동안 어머니는 숨이 가쁜 것이었고 뇌혈관으로 충분한 혈액 공급이 안되어 어지럼증과 빈혈이 빈번했던 것이었다.


어머니의 병의 원망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이렇게 아프게 만든 장본인이 그였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루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어머니의 병부터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감정만 앞세울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수술날짜가 잡혔고 10 시간 넘는 장시간의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어머니는 수십 개의 줄에 둘러싸여 있었고 퉁퉁 부은 모습에 눈물이 흘렀다. 제발 살아달라는 마음뿐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보내시고 일반병실로 옮겨졌고, 정신적 체력적으로 많이 약해진 어머니는 퇴원을 하게 되었다. 정상적인 활동은 할 수 없었고 집에서 몸이 회복할 수 있도록 돌봐야 했다.


병원에 있을 때 지인으로부터 받은 위로금이 없어졌다. 그동안 어머니 병문안을 오셨던 친척, 지인들로부터 받은 작은 위로금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떠오른 생각이 그였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그간 병원에 있을 때 받은 돈은 그가 받아놨다는 것이었다. 가져갈 게 없어서 그 돈을 가져간 걸까. 이 상황에서도 그러고 싶었을까. 어머니의 병환은 안중에도 없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 기회로 그가 바뀌기를 내심 기대도 하였다. 그러나 그건 나의 허황된 희망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어머니의 몸이 회복은커녕 악화될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처를 강원도 강릉으로 옮겼다. 외삼촌께 부탁해서 어머니를 시골로 옮겼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회복이 우선이 되어야 했다. 필요한 물건과 옷가지를 챙겨 나는 어머니와 시골로 갔다. 그 몸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몸부터 추스르자고 설득하였다. 어머니와 살 곳은 마련했지만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다행히 외삼촌께서 하시는 건축일을 하기로 하고 나는 다른 인부들과 막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힘들어도 땀 흘려 번 돈으로 어머니와 살아가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어머니는 오래 하지 말고 다시 서울로 가자고 하셨다. 자신이 아들의 앞 길에 걸림돌이 되는 게 싫었던 것이다. 어머니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서울로 가서 거처도 마련하고 직장도 알아보겠다고 하였다.


서울 부동산에서 살던 집 매매 전화가 왔다. 우리 집이 매물로 나와있다는 전화를 받고 무슨 소리인가 했다. 집을 내놓지 않았는데 매매라니. 상황은 이러했다. 그가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집을 팔 생각으로 그가 매매를 하려고 내놓은 것이었다. 어떻게 장만한 집인데 하루아침에 집을 내놓다니. 어머니가 어렵게 모으고 모아 마련한 집이었다. 당장 집이 팔리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 길로 서울로 달려가 가 압류 신청을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와 말로는 해결이 안 될 상황이었다.


이혼과 재산분할을 하였다. 보금자리까지 팔 생각을 한 그와 더 이상 같이 살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이혼 권유는 하였지만 한 편으로는 부부문제를 자식이 나서서 관여하는 것이 맞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환과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와 학업 중인 동생과의 생활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 생활하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대면하여 어머니의 이혼서류를 주었고 가압류된 집을 재산분할 하기로 하였다. 재산 분할과정에서 그와 마주하고 협상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는 나의 아버지다. 자식이 아버지와 평생을 살아왔던 집을 쪼개어 나누는 상황에 동네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나는 결혼하기가 싫었다. 아니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언젠가는 그의 모습으로 미래의 아내와 자식에게 고통을 주지 않을까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자란 것이 결혼은 하면 안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 이후로 나는 결혼을 하면서 한 가지 결심을 했었다. 내가 이룬 가정은 과거 그가 이룬 가정처럼 되지 않기를. 최소한 부부문제로 자식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를. 지금 내 나이가 당시 그의 나이즈음 되었다. 아내와 자식을 둔 지금 나 스스로에게 후회하지 않냐고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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