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통보를 받았다. 17년의 직장생활을 하던 42살 나이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몇 개월 전부터 이런저런 소문은 있었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줄 알았다. 실체는 없고 무성한 소문만이 난무한 상황은 나를 더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팀장으로서 팀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을 애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다그쳤던 나였지만 신경은 계속 쓰였다. 소문이 실체를 드러낸 것은 한 달 하고 일주일을 남겨놓고 공고를 보고 알았다. 부서 자체를 해외이전하며 관련 부서의 직원은 권고사직을 한다는 내용이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뭐라도 해야 했다. 유치원생과 4살 그리고 8개월인 셋째가 아른거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래서 몇 차례 임원을 찾아가 유예기간을 달라고 해봤고, 월급을 줄인다고도 해봤다. 그러나 회사 방침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바짓가랑이 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매일매일 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내에게 앞으로 한 달 뒤 퇴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몸이 두 개어도 모자랄 상황의 아내에게 입이 선 듯 안 떨어졌다. 이직할 회사를 알아보고 말을 하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퇴근 후 집에서 아내를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무얼 해도 집중이 안되었다. 지금의 평화로움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아껴 쓰고 하고 싶은 것 하지 않고 살림을 해온 아내였다. 그런 아내에게 말해서 짐을 더 얹어 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한 달 안에 해결을 할 생각이었다.
매일 이력서 작성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해보지 않았던 일, 장소, 나이 가릴 게 없었다. 제조업, 서비스업 등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이력서 제출을 하였다. 몇 개를 제출했는지 제출한 회사가 헷갈릴 정도였다. 조급한 마음에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하니 이력서도 엉망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거의 되어 더 이상 아내에게 숨길 수는 없었다.
아내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며칠 있으면 퇴사를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아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무덤덤하였지만 속은 그렇지 못할 것이었다. 이직회사를 알아보면서 처음으로 실업급여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퇴사를 한 후에는 집에 있을 수 없어 집 근처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내도 심란한 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못했고 혹시라도 낮에 동네 아는 분을 마주칠까 걱정도 되었다.
그렇게 답답한 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아내는 내게 마라톤 대회를 나가라고 하였다. 사실 몇 달 전부터 마라톤 대회 준비로 운동을 계속 해왔었다. 그러다 퇴사를 하게 되면서 도저히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운동도 하지 않게 되었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마라톤이냐고 허투루 듣고 대답하였다. 지금까지 준비한 게 있고 신청도 해 놨으니 나가 보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제한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마음 한편이 불편하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대회준비를 하였다.
마라톤 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내게 아내는 날씨도 좋으니 설악산도 다녀오라고 했다. '혼자?' , '어 혼자 다녀와'라고 하면서 대피소 예약을 하고 1박으로 다녀오면 된다는 것이었다. 동네 산이야 주말이면 가끔 다녀봤지만 설악산 대청봉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시간도 있고 날씨도 괜찮으니 다녀오라는 아내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마라톤 대회를 앞두고 혼란스러운 심정과 다르지 않았던 나는 솔직히 가기 싫었다. 이런 불편한 상황과 심정으로 혼자 여행을 가는 게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차라리 애들 좀 봐달라고 하고 쉬었다고 온다고 하면 내 마음이 좀 편할 텐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결국 떠날 날짜를 정하고 대피소 예약을 해서 새벽에 출발을 하였다. 혼자 가는 여행? 등산?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지금의 내 상황을 모두 내려놓은 느낌이랄까. 버스는 설악산 등산로 근처에 정차하였고 나는 버스를 타고 입구로 향했다. 도착 후 등반을 시작한 시간은 10시 반 정도였다. '악'자가 들어간 산은 험하고 힘들다는데라고 생각하며 터벅터벅 올라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이 없었다. 점점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은 비 오듯 계속 흘렀다. 마라톤 후 생긴 물집에 한 발 한 발 내 딛기도 힘들었다. 가끔 고개를 들면 경치는 좋았고 머릿속은 무념무상이었다. 무사히 대피소까지만 갈 수 있기를 바랐다. 오전 10시 반 출발해서 오후 5시 도착했으니 6시간이 넘는 등반을 해서 대피소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새벽 해돋이를 보고 내려와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
마라톤 대회와 설악산 등산은 내게 작은 성취감을 주었다. 퇴사 후 직장을 구하기에 전전긍긍했었고 다른 것은 내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었다. 오직 생계유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만 생각하면서 보냈었다. 회사에 원망도 많았고 지금 나 자신의 처지에 실망도 많이 했다. 그런 시간을 뒤로하고 내키지 않았던 마라톤 대회와 설악산 등반은 내게 자신감을 주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잘 될 거라는 생각과 뿌듯한 기분으로 표정도 한결 좋아졌다. 며칠 뒤 뜻하지 않게 한 중견기업에서 연락이 왔고 다행히 실업급여를 받기 전 재 취업을 할 수 있었다.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황을 바꾼 것은 작은 성취감이었다. 이직할 회사를 정해놓고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이직에 성공하지 못하고 실업급여를 받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표정관리를 하려고 해도 걱정 한가득 어두운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가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마라톤과 설악산 등산으로 성취감을 가지고 자존감을 높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가끔 아내와 술 한잔 하면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마라톤과 등반을 하라고 했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고 하면서 당장 우리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여서 다녀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의기소침해 있는 내가 힘을 낼 수 있었으면 싶었다고도 했다. 42살에 권고사직을 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눈앞의 어려움이나 고민이 해결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