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뚱바오 Jun 25. 2024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기억

어느덧 여기까지..

머릿속이 하해지고 등에서는 식은땀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어디에다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 입에서 나오는 말의 떨림은 내가 느낄 정도였고 얼굴은 마비가 된 듯했다. 준비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잘 못 한 것도 없는데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많은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은 내가 20대 초반 얼떨결에 맡았던 단체에서 나의 모습이었다. 당황스럽고 창피했던 그 기억은 그 후에도 누군가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콤플렉스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10명 20명 아니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웠다. 저 사람은 어떻게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나와 같은 창피한 시간을 겪고 이겨 낸 것일까.

그로부터 수년이 흘렀다. 회사에 입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발표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회사 대표부터 임원까지 모인 자리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예전에 창피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연차를 내고 쉬어 버릴까. 제정신으로는 못 할 것 같으니 소주라도 한 잔 마시고 할 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피할 길은 없었다. 발표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이다.

퇴근 후 집에서 큰 소리로 연습을 했다. 방 안에서 혼자 자료를 보고 한 톤을 높여 벽 보고 발표연습을 했다. 서서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누워서도 했다. 발표자료를 외우려고 한 것은 아닌데 한 번 두 번 하다 보니 외워졌다. 이틀 째 연습을 할 때는 자료는 보지 않고 했고 혹시 모를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도 마련하였다. 아무리 연습이라도 긴장은 되었으나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드디어 발표 날이다. 오전 업무를 어떻게 했는지 기어도 없이 자료 발표만 생각했다. 회의가 시작되고 나의 발표 시간이 되었다. PT 자료가 정면에 올라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나씩 발표를 시작했다. 중간중간 임원들의 질문이 있었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해서 대답을 하였다. 약 20분 정도의 발표가 무사히 끝났다. 마지막으로 대표께서 준비를 잘했다고 하는 말에 나의 자신감은 두 배가 되었다.

얼마큼 긴장을 했는지 모를 것이다. 대표님의 ‘발표는 괜찮네’라는 말은 과거 내가 얼마나 창피함과 두려움을 느꼈었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타고나지 못하면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사람이 아닌 벽이었지만 그렇게 라도 외쳐야 했다. 다행히 소주는 마시지 않고 무사히 마쳐서 다행이었다.


내가 부족했던 것은 연습이었다. 누군가 앞에서 말을 할 때는 연습을 했어야 한다. 무슨 똥 배짱으로 연습도 하지 않고 그런 무모한 행동을 했는지 절실히 깨달은 경험이었다. 발표 내용의 경중의 문제가 아니었다. 작은 발표나 큰 발표나 미리 연습을 하지 않으면 당황하고 대처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망신만 당하고 말 것이다. 무대 체질이 아닌 나로서는 연습만이 살 길이었다. 그 후로는 팀, 부서, 임원회의 등등 발표가 있으면 무조건 연습을 한다. 시간이 없으면 출퇴근 길에도 연습을 해야 안심이 된다.

이전 08화 매년 반복되는 연례행사. 살 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