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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바오 Jul 01. 2024

아이 셋 홀아비가 될 뻔했던 남자.

어느덧 여기까지..

제 때 식사를 못 했던 아내는 막내를 옆에 끼고 밥을 먹거나 서서 대충 먹어치우기 바빴다. 밥을 씹어 먹는 건지 아니면 먹어 치우는 건지 모르게 먹다 보니 위경련이 자주 발생 했다. 한 번 경련이 일어나면 밤새도록 배를 움켜쥐고 있다가 다음날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 약을 먹어야 진정이 되었다. 셋을 키우다 보니 본인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아이 키우는 집을 보면 옛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우스갯소리로 한 명은 발로도 키운다, 둘은 각자 한 명씩 맡으면 되니 키울 만하다. 그런데 셋부터는 정신줄 바짝 잡고 있어야 한다며 우리는 추억을 얘기 한다. 


육아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꼽으라면 2살, 5살, 8살과 함께 살고 있던 때가 아닐까 싶다. 우리 집은 10년이 넘도록 똥기저귀는 쌓이고 치우고를 반복했으며, 아내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를 보내는 엄마였다. 나는 퇴근하고 집에 가면 엉덩이 붙일 새가 없었다. '나 힘들다'라고 내 몸하나 씻고 소파에 앉아 있으면 속된 말로 '양심을 파도에 쓸려 보내 버린 남자'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설거지를 하던 기저귀를 치우던 보채는 아이를 돌보던 할 일은 태산이었으니 손 만 대충 씻고 뭐라도 거들어야 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났다. 소리에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문 좀 열어보라고 했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아내의 손에는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탈모가 심한 것 같다고 했다. 아내의 머리를 보니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다. 500원짜리 동전크기의 탈모가 한 군데가 아닌 여러 곳에서 보였다. 화장실 바닥은 빠진 머리카락이 수북했다. 괜찮다고 병원 가보자고 말을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상실감이 컸을 것이다. 육아를 하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로서 아이를 키우느라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했고 그 결과가 이런 초라한 모습이라는 것에 화도 났을 것이다. 


그 후로는 모자를 쓰고 다녔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주 3회 주사를 맞았다. 일시적일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가지고 아내는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 먹는 것과 운동도 열심히 했다. 헬스장은 못 가지만 홈트레이닝으로 땀을 흘려가면서 6개월을 꾸준히 했다. 다발성 탈모가 있었던 부위에서 솜털처럼 머리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아내는 다시 한번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아내의 탈모는 병원 치료와 식사 운동으로 회복되어 갔다. 


탈모는 치료했지만 위경련과 온몸의 냉증 그리고 빈혈기가 있는 것 같아 검진을 받았다. 검진결과 예상했던 데로 빈혈 수치가 좋지 못했다. 여자들은 빈혈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모르니까 약을 좀 먹자고 권했지만 이 정도 빈혈은 괜찮다며 밥 잘 먹으면 된다고 '오늘 저녁은 뜨끈한 순댓국 먹자 곱빼기로...' 라며 웃어넘겼다. 


탈모가 진정되고 다음 해 여름 어느 날 퇴근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은율이 아버님이죠?'

'네 그런데요.'

'지금 아내분이 OO에서 떨어졌어요?'

'네? OO에서요? 지금 거의 다 왔으니까 빨리 갈게요'


아내는 막내가 어린이집 하원 후 집에서 식사를 하고 놀이터로 갔다고 한다. 막내는 친구들과 놀고 있었고 엄마도 같이 놀자고 졸라대는 성화에 힘들지만 같이 놀아줄 생각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미끄럼틀로 올라갔다고 했다. 주위 아주머니들이 한순간 쿵 하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미끄럼틀 위에 올라갔던 아내가 땅에 엎어져 있었고 입고 있던 치마는 세로로 반쯤 찢겨 있었다고 한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119가 도착해 있었고 아내는 놀이터 밴치에 앉아 있었다. 


아내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모르겠다는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물어보니 남편은 알아봤다. 우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자고 해서 아이들을 맡겨놓고 아내와 나는 엠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가면서 아내에게 다시 물어봤다. 어떻게 된 일 이냐고 왜 미끄럼틀에서 전봇대 쓰러지듯 그렇게 떨여졌냐고 누가 밀었냐고 물어보았다. 아내는 집에서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집에서 아이와 놀이터로 가는 것과 놀이터에서 아주머니들 만나서 인사 나눈 것 막내와 놀던 것들이 기억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했다고 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손 발을 주무르며 병원에 도착했다.


뇌 CT를 찍고 몇 가지 인지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는 심하지 않은 뇌진탕이라는 소견이었다. 다만 기억을 못 하는 것은 뇌진탕으로 단기 기억을 못 하는 것 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웃어넘겼던 빈혈에 의해 미끔럼틀 난간에서 허공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될까, 그 높이에서 나무토막 넘어가듯 떨어진 것 치고는 다른 외상은 없었다. 며칠 뒤 CT결과 뇌에도 큰 이상은 없다는 의사의 말에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루아침에 남편도 못 알아볼 뻔했던 아찔한 사고를 겪고 나니 놀이터의 미끄럼틀을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난다. 미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누구의 잘 못도 아니지만 많이 안쓰럽다. 아이 셋을 키우느라 똥기저귀를 달고 살아야 했고 탈모로 많이 힘들어했으며 몸은 어디 한 구석 온전한 곳이 없이 힘들어했던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었다. 


우리 나중에 둘만 남으면 이런 추억 더듬어 보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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