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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eah Jun 17. 2023

선유도에서의 마지막 주말

이사, 정리, 마지막, 새롭게 다가오는 시작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재고 따지다 결국 선유도를 떠나게 되었다.

왠만하면 이 동네에 계속 있고 싶었지만, 선유도에서는 마음에 드는 아파트가 없었고, 있으면 상태 대비 예산이 너무 높았다.

그래서 결국 마포로 집을 구했고, 이제 곧 이사간다.

스무살때부터 혼자 살면서, 교환학생도 이나라 저나라 다니면서, 이사를 수도 없이 했지만, 나이가 들 수록 짐이 점점 많아지기도 하고,

뭔가 이사라는 것에 필요성이 아닌 감정적인 것이 결부되면서 좀 더 큰일로 다가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2년전 집을 구하러 찾아 다닐 때, 선유도를 처음 와보고 마음을 흠뻑 붙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조용하고, 혼자사는 가구가 많고, 무엇보다도 처음 본 집이 정말 맘에 들었기에 고민도 없이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 정을 붙이게 되었고, 회사 출퇴근 길이 익숙해지고, 자주가던 세탁소, 반찬가게, 마트, 카페 등이 생겨났다.

8년간 여의도 빌딩 숲 오피스텔에서 살던 나에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동네 마트나 세탁소의 존재는 내 삶의 질을 드라마틱하게 수직 상승하게 해주었고,

나도 뭔가 남들처럼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안도감? 동질감 같은게 느껴져서 삶에 단단한 안정감을 많이 찾았다.

왜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모든것을 희생해가며 그렇게 오래 살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이곳에서 다른 곳보다 값싸게 세차를 하는 집 앞 단골 세차장이 생기고, 우리 동네에는 차 수리점이 많아서, 가끔 차 타이어를 갈거나 수리할때 5분 이내로 도착 할 수 있었다.

한강까지 도보 5분 거리인 점도 한 몫했다. 혼자라서 울적할 때, 모자 푹 눌러쓰고 한강에 나가서 무작정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나면 우울한 마음이 금새 사라졌다.

선유도역 근처에는 예쁜 카페가 참 많다. 스타벅스 할리스 같은 대형카페가 아니라 정말 요즘 보기드문 아기자기한 개인 카페들이다.

주말마다 하나씩 도장깨기 하듯 카페를 찾아다니다 보니, 이 근처에 있는 예쁜 카페들을 한번씩 다 가보게 되었다.


그러다 함께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와 같이 지내면서, 함께 걷던 산책로, 같이 타던 자전거길, 함께 가던 카페나 추억이 어린 장소들이 더 많이 생겨났었다.

일요일 늦은 아침마다, 둘다 슬리퍼를 끌고 반쯤 눈을 겨우 떠서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이 동네를 돌아다니던 기억들,

함께 재택근무 할때 점심시간 맞춰서 잠깐 나가서 커피를 사먹고 동네 산책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기억들.

결국 나를 아직도 옭아매고 있었던 것은 거창하고 화려한 기억들이 아닌, 소박하고 따뜻했던 작은 기억들이었다.

헤어지곤 한동안 집 근처를 걸어다니는게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괜히 미련이 남는건지, 아니면 내가 이 동네에 너무 빠져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사를 준비하면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집까지 걸어오는데, 평소엔 역이랑 멀어서 진절머리 나던 길이, 문득 정말 많이 그리워질거라는 생각에 울컥했다.

몇년 후에, 내가 많이 달라진 후에 이 길을 조용히 걷게되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그래도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하다. 이사준비를 하면서 캐캐묵은 잡동사니들과 안입는 옷들을 묵은 감정들과 함께 털어냈다.

그리고 함께 사용했던 테이블이나 쇼파도 다 팔아치우고, 새로운 가구들과 가전들을 새로운 큰 집에 맞게 전부 주문했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고 새로운 시작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또 어떤 일들이 내 앞에 펼쳐질지, 또 어떤 인연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될지 한창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언젠가 이런말을 봤다.

높은 산에서는 산소의 부족함을 느껴 조급하게 공기를 듬뿍 들이마시려고 하지만,
그럴때일수록 숨을 내쉬어야 한다. 숨을 내쉴수록 산소가 몸속에 들어온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취하려고 달려들거나 움켜잡으면 결국 모든 것이 모래알처럼 내 손을 빠져나가는 경험을 종종 했다.

모든 것을 그르치는 것은 조급함과, 그 집착이 가져오는 욕심이 아닐까.

그래서 내쉬려고 한다. 후 하고 내쉬어서 또 무언가가 내 안에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묵은 감정도, 쓸데없는 물건들도, 과거에 대한 집착도 미련도.. 모두 정리하고 버리고 내뿜을 것이다

그렇게 깨끗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다 보면, 어느샌가 내가 필요한 산소가 내 몸안으로 흘러들어오겠지.


노을이 질때, 그리고 날씨가 화창한날 창문으로 보이던 풍경
지난 초여름에 집에서 밖을 내다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항상 펼쳐졌다. 물론 저 운동장은 작년 계속되는 침수에 망가지고 복구하고를 반복했지만
노을이 질때, 우리집에서 보이는 하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이 하늘을 수채화로 그려보려고 많이 시도했지만, 눈에 보이는 이 색감을 만들어 표현해 내기 어려웠다
집에서 본 밤의 풍경. 외국같아서 매번 감탄하면서 바라보았다.
이사오고 얼마 안되어서 찍은 사진. 공기만 좋으면 남산타워, 잠실 시그니엘까지 보이던 우리집 거실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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