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시집살이를 한 여자가 며느리 시집살이를 더 시킨다고 한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는 말도 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그 고통을 자신이 더 잘 알면서 2차 피해자를 만든다는 사실은 이토록 무서운 일이다. 이 인간도 그랬다. 좋은 부모가 아니 이 인간은 엄마니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나는 늘 딸 옆에 있어주고, 웃어주고, 안아주고, 마음껏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지.'
'내가 화난다고 힘들다고 힘없는 딸에게 화풀이하지 말아야지. 적어도 내 눈치 보며 집에 있는 게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해 줘야지. 날 생각하면 행복하게 해 줘야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무조건 사랑하기. 무조건 이해하기.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식이니까. 하지만 이 인간 역시 정신적으로 미성숙했고 준비된 엄마가 아니었다.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산후우울증인지 그냥 우울감인지 혹은 내재된 화가 그렇게 많았던 것인지 감정이 불안정했다. 역시 무기력했고, 목표도 없었기에 어떤 결심도 실천도 하지 않는 날들, 해가 뜨니까 하루가 시작되고 지니까 하루가 끝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잘하자는 마음은 그래도 있어서 나름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사랑 표현에는 역시 서툴렀지만 말을 시작하는 아이가 질문을 하면 잘 대답해 주려고 노력했고 (그때의 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랬다)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지 않으려고 했다. 버릇없이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의 발달 과정 중에 하는 호기심 어린 행동이라면 집에서 쌀통에서 쌀을 주물럭거리며 재미있어하는 아이가 쌀을 한 줌 두 줌 꺼내서 바닥에 문질러도 혼내지 않았다. 책을 좋아해서 읽어 달라고 오면 똑같은 책을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읽어줬다. 하지만 이러다가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럭 화를 냈었고 아이는 움츠려 들었을 것이다. 이 인간의 엄마가 했던 폭언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알면서도 그 폭언을 터뜨리기도 했다. 아이는 어느 순간 엄마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웠던지 어딜 가도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가면 같이 앞으로 갔고 잠시 먹던 음료수 컵을 버리러 쓰레기통에 가도 졸졸 따라왔다. 같은 행동을 아빠에게는 하지 않았다.
아이가 좀 크고 학습지를 할 때도 이런 폭력성은 드러났다. 이해력이 빨라 진도가 빠른 것을 칭찬하고 그 상태를 받아두면 되는데 그러지 못했다. 더 잘하지 못한다고 핀잔했고, 이 쉬운 걸 모른다며 무시하기도 했다. 그게 나쁜 행동인 줄 알면서 그 어린아이의 머리를 탁탁 치기도 했고, 학습지를 아이 앞에서 찢어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아이는 울면서 셀로판테이프로 그 종이를 이어 붙였다.
어느덧 이 인간은 2차 피해자를 만들고 있었다. 이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말과 행동을 하다니, 그게 얼마나 힘든지 상처가 되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이 시기에 언젠가 남편이 한 말이 있었다.
"당신, 어머니한테 그렇게 상처받았는데 가끔 **에게 똑같이 하는 것 같아."
"알아. 알면서 그러는 거."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인 유아기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이런 엄마였다는 생각에 지금 생각하면 몸서리쳐지고 미안한 마음에 혼자 울기도 한다.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지. 이 인간은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자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또 주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는가. 이 인간은 그래도 더 늦지 않게 이 사실을 깨달았다. 육아서, 육아심리, 교육심리에 관련된 영상, 책을 꾸준히 보고 읽고 정신적 성장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유리처럼 약한 멘털은 쉽게 부서지기도 했지만 부서지면 다시 세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무던히 애썼던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아이와 남편과의 관계는 나빠지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은 더 좋아졌다. 딸과 남편은 집에 오는 것을 행복해하고 아내와 엄마와 외출하고 밥 먹고 무언가를 같이 하고 싶어 한다. 일상을 공유하며 수다를 떨고 고민 같은 것도 서로 대화를 하며 의논하는 것도 좋아한다. 다행이다. 그 어려운 시기가 지나서. 그 과정에서 이 인간이 실천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미안하다"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것. 성장한 딸과 대화 중 일부이다.
"엄마가 곧 갱년기가 올 텐데, 너는 아직 사춘기가 끝나지 않았고. 그런데 갱년기가 사춘기를 이긴데. 엄마가 감정적으로도 불안정해서 갑자기 너한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수도 있어. 그럴 때는 '아 엄마가 갱년기라서 그렇구나.'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어."
"괜찮아. 지금의 엄마는 다 괜찮아. 옛날에 엄마가 더 못됐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엄마가 그래도 힘들지 않을 것 같아." 하면서 다 기억한다면서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화났었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한다.
"음... 그랬었지.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미안해. 엄마는 안 그러고 싶었는데 이해할 수가 없네. 정말 미안해."
"괜찮아. 지금은 안 그러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이제 이 인간이라고 하지 않겠다) 괴롭고 아프다. 즐겁다가도 슬퍼진다. 내 가슴에 꽂힌 화살을 왜 딸에게 더 깊게 꽂았을까. 아픈 걸 알면서 더 꾹꾹 힘을 주고 넣었다. 잔인하다. 그리고 혼자서 자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라는 말을 한다. 동시에 '나도 사과받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면 좀 나아질까. 아직도 힘든 이 마음이, 아직도 두려워하는 이 마음이. 사과를 받지 못하더라도 이제 너무 나이 든 그들이 변하는 것보다는 내가 변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다. 그래서 자기 돌봄 , 마음치유를 하며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로 했다. 매일 명상을 하고 글을 쓰고 나를 돌아보기로 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현실을 긍정하며 밝은 세상을 꿈꾸며 이런 마음을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내게 흠이 될 수 있는 이런 과거,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기록하며 내 아픔의 근원을 찾고 싶었다. 내 마음은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내가 마음먹기 나름이니까, 지금부터 내 삶의 주인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