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현관문 앞에서 씨익 웃어본다. 열심히 준비했던 수학 단원평가를 엉망으로 봐버려서 우울한 마음이지만 애써 털어내 보는 거다. 내 표정을 보고 걱정할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 절반, 집에서는 좀 내려놓고 쉬고 싶은 마음 절반이다.
문을 열고 힘차게 목소리를 낸다.
"엄마~ 오늘 저녁 뭐야? 배고프다~"
아빠는 현관문 앞에서 어깨를 툭툭 털어내며 긴장을 풀어본다. 하루종일 과한 요구를 하며 끈질기게 나를 압박하던 고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다. 이 감정을 그대로 안고 집에 들어가면 애꿎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괜한 일로 폭발할 것 같다.
문을 열고 너스레를 떨어본다.
"이리오너라~ 아부지 오셨다~"
엄마는숨을크게들이쉬고내쉬어본다.탁탁탁, 양파를 썰면서도 마트에서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눴던 동네 엄마의 무례한 말이 자꾸 떠올라 열이 받는다. 아까 요렇게 조렇게 받아칠 걸,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돌아선 내 자신이 분해서 오늘 밤 이불킥 예약이다. 그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하루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고 돌아온 가족들을 맞이하는 나의 첫 표정과 말투에 반가움과 다정함이 잔뜩 묻어나길 바란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가서 아무리 상처받아도, 아무리 지쳐도
다시 문을 여닫고 돌아오면 이곳에서는 모든 게 괜찮아진다고 믿게 하고 싶다.
가장 친밀한 가족이 주는 다정과 존중은 마음의 용량을 키워주니까 오늘도 난 목소리는 하이톤으로, 입꼬리는 쭈—욱 끌어올려 본다. 조금은 연기가 들어갈 지라도 그 환한 얼굴이 마음의 깜깜함을 조금 밀어내 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진수성찬은 아닐지라도 각자의 입맛에 맞는 따끈따끈한 반찬이 하나씩 올라와 있는 저녁 밥상에서는 이리저리 바쁜 젓가락 소리와 오늘 하루를 나누는 가족들의 목소리로 사운드에 빈틈이 없다. 서로가 자기 이야기부터 들어보라며 앞다투어 말하는 그 순간이 참 좋다.
집으로 돌아와 아무말 대잔치를 벌여도 좋은 건,
‘그래, 네 말도 옳다. 그래, 그 말도 맞구나’ 하고 황희 정승 맛이 나는 가족들의 호응 덕분이다. 비로소 내가 안전한 집으로 돌아왔구나, 내 편이 옆에 있구나 싶은 그 안도감이 좋은 거다.
“엄마, 나 아무 것도 안하고 좀 쉬고 싶어요. 긴장했더니 이상하게 피곤하고 지쳐.”
너무나도 아끼고 애정하는 네가 오늘은 아무 것도 안하고 싶다고 하니, 엄마는 적극적으로 판을 깔아 줄 생각이다. 온수매트도 은근하게 틀어놓고, 시원한 귤은 바구니에 담아두고, 네가 좋아하는 감자칩도 슬쩍 간식 서랍에 준비해둔다.
덕분에 엄마 역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각자의 자유 속에서 내일을 다시 살아낼 힘을 쌓아내보자꾸나.
다시 시작된 아침, 오늘도 모두들 씩씩하게 큰 목소리로 서로에게 ‘안녕히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준다. 사건도 많고 사고도 많은 요즘 세상에 하루를 잘 살고 집으로 다시 돌아와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고 행복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이 우리가 만나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을 간절히 담아 집을 나서는 가족 모두에게 매일, 아니 매번 꼭 당부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꼭 지키는 두 가지 규칙의 이야기였다.
첫째, 가족이 집을 나설 때에는 집에 있는 나머지 가족들 모두가 배웅해주기
둘째, 가족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집에 먼저 돌아온 가족들 모두가 환영해주기
특별하지 않은 규칙이더라도 안녕을 바라주고, 무사 귀환을 환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매일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어쩌면 내가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내 마지막 모습이 될 수 있다면,남편과 아이에게 내어주는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조금은 더 소중해지지 않을까?두 번 뾰족할 말투가 한번만 뾰족해지고, 세모눈을 치켜떠야 할 상황에서 일자 눈 정도로 합의가 봐지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