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친해져야 한다
인생의 중년기를 살아가고 있다면 기적 같은 일이다. 한국인들의 기대 수명이 80세 이상으로 늘어나서 마치 모든 인생이 오래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생을 충분히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해가 잘 안 되면 대학 병원의 어린이 병동으로 가봐라. 죽음을 마주하는 어린아이들의 삶을 통해서 나에게 당연한 삶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죽음을 처음 맞이하고 경험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그 당시 친가나 외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 나와 마찬가지로 현재 중년의 나이대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린 시절에 경험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이 처음 경험한 죽음인 경우가 많을 것 같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와의 관계의 친밀함에 따라서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아픔이 컸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어린 시절에 죽음을 이해하기로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일이었다.
요즘은 거의 하지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60세 환갑잔치를 크게 했던 기억이 난다. 60세 전후가 되면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자연스럽게 듣던 시기였다. 당시에 60세는 보통 일에서 은퇴를 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년기였다. 지금은 기대 수명의 연장으로 중년기가 좀 더 늘어났다. 일례로 공무원의 은퇴 나이가 늘어났다. 그래서 60세를 노년기라고 보기가 어렵다. 노년기는 죽음과 가까운 시기이다. 아마도 중년기부터 죽음을 자주 경험하는 것 같다.
중년의 나이대에는 중년의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장례식에 갈 일이 많아진다. 극과 극처럼 결혼식과 다른 장례식의 분위기가 있다. 전통적으로 장례식에서는 향을 피운다. 시대의 변화로 하얀 국화를 놓고, 상주는 검은색 옷을 입는다. 죽음으로 인한 눈물과 울음이 들니다. 이처럼 장례식에서는 죽음을 시각과 청각과 후각으로 경험한다. 일상과 다른 경험이다. 중년에는 죽음을 경험할 일이 많아진다.
장례식은 솔직히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한 깊은 슬픔을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어릴 적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장례식 장면이 이해가 되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경험했던 장례식에는 밤을 새워서 화투를 치고 술을 마시는 동네 어른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장례식과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놀이를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해야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를 이겨내고 고인을 보내는 자리에서 상주들과 함께 할 수 있었겠다 싶다.
장례식은 인생을 참 단순하게 만들어 버린다. 결국 죽음이다. 화려한 색깔의 인생을 살았더라도 죽음은 상복의 검은색과 국화꽃과 수의의 흰색으로 단순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주 접하다 보니 내가 맞이할 죽음이 친숙해진다. 그렇다고 친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마냥 두렵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젊음의 힘으로 멀리했던 죽음이었다. 죽음과 인사할 일일 없었다. 그런데 중년의 나에게 손을 흔드는 죽음이 반갑지는 않지만 인사는 할 줄 알게 되었다. 중년은 죽음과 친해져야 할 시기다. 죽음을 무섭고 두려운 대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