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가모모씨 Aug 19. 2021

취미로 버스를 탑니다 | 지은 글

某某씨 지음

기어코 우리는 나아갔다.


매일 같은 시각에 눈을 뜨고.

아침이 왔는지도 모른 채로 씻고.

매일 같은 화장을 하고.

매일 같은 지하철에 올라서.
 매일 같은 사무실로 오는 것.

매일 같은 사람들에게 전화와 메일을 돌리고

매일 같은 시각에 퇴근을 하고.

매일 같은 시간에 집에 돌아와

매일 같은 시간에 기대 없이 잠이 드는 것.


그런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챗바퀴처럼 일상을 굴린다. 그러면 나는 이따금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 죽는걸까?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켜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간다. 팔로워 157명. 팔로잉 170명. 많지도 적지도 않은 서로를 쫓는 사람들 속에 나는 살고 있었다. 누군가는 힙하다는 카페에서 누군가는 최근 유명한 전시회의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나였고, 나는 그들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그들이 하고 있었고, 그들이 하는 것을 나는 하고 싶어했다. 그 속에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일을 잃어버렸다. 조용히 스마트폰에 메신저 메시지가 뜬다.


- 오늘 약속 잊지 않았지?


아, 정말. 계속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걸까?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아픔에 머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눈을 뜬다. 너무 취한 나머지 같이 술을 먹었던 친구 민정이와 주변 모텔에서 잠을 청했던 것이다.


“야. 이게 무슨 일이야. 남 결혼하는데 왜 우리가 골이 아프냐.”

“그러니까. 야, 대충 일어나. 요 앞 편의점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고 집에 가자.”


오늘도 우리는 언제나처럼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비운다. 골이 계속 울린다는 민정이를 먼저 보낸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더라. 술을 마신 곳에서 가깝다면 가깝지만, 걷기에 꽤 먼 거리다. 낯선 거리. 아픈 머리. 어제부터 이어진 센치한 기분. 지하철역 근처에는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문득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본 재미있는 경험담이 하나 떠오른다.


- 연애를 한지 3년이 다 되어가니까, 이제 정말 할 게 없더라고요. 서울 내에 있는 맛집이나 카페는 다 돌아다녔고, 영화도 나올 때마다 보니까 볼 것도 다 떨어지고. 진짜 핫플이란 핫플은 다 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생각을 한 게 버스를 타는 거에요. 주변에 아무 정류장이나 골라서, 앱으로 주사위를 굴리는 거죠. 주사위에 나온 숫자가 3이면 세 번째로 오는 버스를 타요. 그리고 버스를 타서 또 주사위를 굴려요. 그러면 그만큼 떨어진 정류장에서 내리는 거에요. 그럼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리거든요. 진짜 아무 것도 없는 주택가에서 내릴 때도 있어요. 그럼 또 거기서 할 걸 찾아요. 생각보다 새롭고 재밌더라구요.


왜 이 얘기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낯선 거리에 서 있는 낯선 버스 정류장. 왠지 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인다. 스마트폰을 들고 주사위 앱을 검색해본다. 역시 스마트폰엔 없는게 없나 보다. 주사위 한 개를 도로록 굴려본다. 점이 다섯 개가 찍힌 면이 눈에 들어온다.


와, 버스를 네 개나 지나쳐야 된다고?


벌써부터 포기하고 싶은 느낌. 그렇지만 오늘은 마침 딱히 할 일도 없는 토요일이다. 가을 햇살은 아직 따사롭다. 결국 가방을 정류장 벤치 위에 올려놓고 털푸덕 그 옆에 앉았다. 어찌저찌 네 개의 버스를 보낸다. 기다리는 중간에 동네 강아지도 만난다. 지루한 기다림 끝 드디어 내가 탈 버스가 도착한다. 나는 이 비밀스러운 놀이를 가슴 한구석에 묻은 채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려 노력하며 버스에 올라탄다. 주사위 앱을 켜 이번엔 주사위를 두 개 굴려본다. 총 여섯. 좀 멀리 가보고 싶었는데. 다시 굴려볼까 하다가 규칙을 어기지 않기로 한다. 여섯 번째 정류장 이름은 A 아파트. 조금은 절망적이다.

여섯 번째 떨어진 버스 정류장은 금방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땅에 다시 발을 내딛는다. 고개를 드니 정말 A아파트의 101동이 보인다. 지은지 얼마 안된 듯 깨끗한 외관과 함께 적막한 길거리가 눈에 띈다. 재미 없이 우측에는 아파트가, 좌측에는 상가들이 들어선 거리를 걷는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열두시 반. 이제 슬슬 배가 고파온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들이 낡은 건물 1층에 조르륵 일렬로 나란히 선다. 코를 찌르는 익숙한, 매콤한 냄새. 건너편에 위치한 깔끔한 외관의 작은 학원이 이 낡은 건물의 분식집과 만들어내는 부조화스러운 전경이 낯설게 느껴진다. 깔끔한 테이블과 밀봉한 플라스틱 그릇을 자랑하는 요즘의 분식집 같지 않게 조금은 투박한 분식집이다. 종류별로 산처럼 쌓인 튀김들 옆에는 붉고 진득한 떡볶이들이 졸여지고 있고, 또 그 옆에는 순대가 따뜻한 김에 싸여 흐릿하게 보인다. 가게 안에는 서너개의 빈테이블이 보인다. 집 근처의 깔끔함을 자랑하는 분식집들보다 오히려 친숙하다. 오늘 점심은 여기서 해결 해야겠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어머님께선 열심히 떡볶이를 휘저으시면서 말을 건낸다.


“뭘로 드릴까요?”

“아, 떡볶이랑 순대 각각 1인분씩 주세요.”

“많을 텐데. 섞어서 1인분으로 드려요?”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 김말이랑 야끼만두도 섞어서 넣어주세요.”


슬쩍 나를 바라보며 어머님은 고개를 끄덕하시더니 김말이랑 야끼만두를 떡볶이에 넣고 휘휘 저어 금세 떡볶이와 함께 그릇에 담아 내신다. 곧바로 순대도 무관심한 표정으로 슥슥 썰어 담고는 가져다 주신다. 테이블 위 수저통에서 오래된 듯한 쇠젓가락을 집어 들고 떡볶이를 한입 베어 문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그리운 맛. 나는 그 맛을 음미하기위해 다른 때보다 천천히 음식을 삼킨다. 낯선 이에게 딱히.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지만, 옛 정취를 간직한 분식집은 나에게 계속 대화를 걸어온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고. 지금껏 무엇을 해왔느냐고.  어땠느냐고. 예전이 보고싶지는 않았느냐고. 지금은 행복하냐고.




분식집에서 아점을 거하게 해결하고 아이들이 공을 차는 동네의 초등학교를 지나 작은 사거리로 향한다. 사거리 위에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스마트폰을 세게 쥐고 흔들자 내가 신이 난 만큼 주사위도 경박스럽게 굴러간다. 세 번째. 나는 어느 새 다음 모험을 좀 더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낯선 곳에서 무엇을 해야할 지, 어느 곳으로 떨어질지 그런 것들이 두렵지 않았다. 10여분 후 도착한 버스에 자리하고 앉아서 주사위를 굴린다. 이번엔 세 개를 굴려볼까. 주사위 세 개를 굴리니 한 개를 굴릴 때보다 더 경박스럽다. 총 14. 이젠 좀 멀리 나가겠군. 창 밖으로 특별할 것 없는 서울 거리를 빤히 쳐다본다.

 내린 곳은 6차선 교차로 앞으로 상가들이 즐비한 공간이다. 이 동네에선 꽤 유동인구가 많은 공간인 듯 사람들이 전보다 많이 보인다. 목적지도 없이 혼자 있는 사람은 나 뿐인 것 같이 느껴져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든다.


어? 저기 좋을 것 같은데.


어느 상가 2층에 보이는 만화방이다. 최근에 생긴 것처럼 보이는 깔끔한 외관. 음료도 같이 팔 테니 텁텁한 입안도 좀 리프레쉬 할 수 있을 것 같고, 이 애매한 시간을 적당히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만화방이라니. 사회에 나오고선 전혀 가보지 않았던 곳이다.

 깔끔한 외관의 문 안으로는 신발을 벗어 놓을 수 있는 공간, 음료를 주문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인다. 메뉴도 커피에 에이드, 심지어 덮밥이나 짜파게티 같은 것 까지 주문이 가능하다. 앉아서도 누워서도 만화를 볼 수 있는 수많은 공간이 나를 반긴다. 아무래도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메뉴판을 보던 나는 “다방 커피”라는 메뉴에 눈이 꽂힌다.


“다방 커피가 뭐에요?”

“아, 믹스 커피에요 손님”


대답을 듣는 순간, 설탕 없이 아메리카노나 라떼, 플랫 화이트 같은 것들로 커피맛을 아는 척했던 나를 좀 내려놓고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의 맛을 오랜만에 느껴보고 싶어진다.


“아이스도 되나요?”

“네 아이스로 드릴까요?”

“네 그걸로 주세요”


나는 이미 마음 속으로 여름만 되면 주구장창 들었던 “여름이니까, 아이스 커피”를 부르며 벨을 받아 들고 만화책이 꽂힌 책장으로 다가간다. 슬램덩크나 꽃보다 남자 같은 유명한 만화책들을 지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의 만화책에 손을 멈춘다. 딱 봐도 그저 그런 로맨스물일 것 같은 6권 완결의 만화책.

재미가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스토리가 시작되면서 나는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자존심이 조금은 상한다.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아 벨이 울렸다. 나는 현실세계로 돌아와 커피를 받아 들고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달달한 아이스커피 한 모금이 다시 나를 달달한 로맨스물로 되돌려 놓는다. 한 권을 다 읽자마자 나머지 다섯권을 통째로 가져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또다시 집중.

만화책 여섯권을 모두 다 읽고 책을 덮자마자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에 문득 가끔은 나와 관련 없는 얘기에 웃고, 화를 내고, 눈물 흘리는 이런 방학같은 시간이 나에게 필요했음을 깨닫는다. 오늘은 마음껏 즐기리라. 나는 또다른 만화책을 찾아 책장에 다가섰다.


---


만화방을 나오니 이제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만화방에서 뒹굴 거린 것이다. 이제 마지막 행선지를 찾아가야만 했다. 이젠 익숙한 듯 버스정류장에서 주사위를 굴린다. 주사위인지 아니면 그 뒤에 있는 운명인지가 가리킨 네 번째 버스에 올라타서, 열 다섯 번째 정류장에서 내린다.

산을 깎은 듯 언덕이 가파른 동네에 내리게 되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가 줄지어 서있다. 최근에 돈 좀 있다는 신혼부부들이 몰려 산다던 고급 아파트촌이었다. 아파트 촌 건너 편에도 언덕길이 이어져 내려간다. 언덕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 건물의 반지하에 혼자 어색하게 자리잡은 LP바가 보인다. 오늘은 간단히 여기서 마무리 해야겠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래도 이런 동네에 존재하는 LP바라 사람이 좀 있을 줄 알았더니 아무도 없다. 이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빈티지한 분위기다. 누구를 위한 건지 모를 옛 팝송이 들릴 뿐이었다. 너무 일찍 온걸까.


“어서오세요”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인사에 고개를 꾸벅해보이고는 바 테이블에 앉는다. 주인은 조용히 메뉴판과 작은 스낵, 그리 종이와 펜을 건낸다. 메뉴판을 열어보니 익숙한 칵테일이나 보드카, 위스키 이름이 눈에 띈다. 그 중에 이전엔 보지 못했던 칵테일 이름이 눈에 띈다. Spring, Summer, Autumn, Winter.


“이건 뭐에요?”

“아, 이 네 개는 제가 개발한 칵테일이에요”


흠, 오늘과 너무 잘 어울리는 칵테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낯선 곳에서 낯선 행동을 했던 나에게 주는 오늘의 마지막은 낯선 술. 마침 가을이 오고 있으니, 가을의 술을 시켜보자.


“이거 한 번 마셔 볼게요. Autumn으로 주세요”


다른 칵테일이 그렇듯 칵테일이 나오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오늘 하루가 좋았던 나는 기분 좋게 잔을 들어 입 안에 술을 담았다.


윽, 이게 뭐야.


계피향과 진이 오묘하게 섞인 Autumn은 사실 내 입맛엔 전혀 맞지 않았다. 본인이 만든 칵테일을 맛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밸런스가 맞지 않다. 주인 본인의 취향이라면 제발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맛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잔을 내려놓으면 다시 손이 간다. 귀에는 조용히 LP로 튼 옛 음악이 꽂힌다. 테이블에는 종이와 펜이 놓여있다. 낯선 주인에게 나는 말없이 신청곡을 종이에 적어 건내고 우리는 말 없이 조용히 음악에 귀 기울인다.


선선한 날씨.

모르는 동네의 텅 빈 바.

신청곡을 적을 때 사각거림.

맛없는 칵테일.

말없는 주인과 손님.


괜히 이 분위기를 술을 고르고 추천을 받으면서 깨고 싶지 않아서 나는 맛없는 칵테일을 한잔 더 시켜본다.


신청곡과 주문으로만 채워진 대화에 나는 평온함을 느낀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

낯선 장소로의 떠남

낯선 것들의 경험


생각해보면 몇 년 전 쯤에 나는 낯선 것을 참 좋아했는데. 언제부터 이런 것들을 무서워하게 된걸까. 낯선 것에 평온함을 느꼈던 오늘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겪는 두근거림에 얼굴도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 날 이후에도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아침이 왔는지도 모른 채로 씻고.

매일 같은 화장을 하고.

매일 같은 지하철에 올라서.
 매일 같은 사무실로 향했다.

매일 같은 사람들에게 전화와 메일을 돌리는 것도 여전했다.  

같은 시각에 퇴근을 하고.

같은 시간에 잠이 들었다.

이따금은 이렇게 살다 죽는 걸까 라는 생각도 여전히 들었다.


다만, 나는 그럴 때면 버스에 오른다. 새롭게 알게 된 분식집이 생겼고, 몇몇 동네는 너무 마음에 들어 나중에 살고 싶은 동네로 가슴 속에 남겨 둔다. 혹은 주사위가 가리키는 대로, 술집이나 이자카야에 혼자 들어가보기도 했다. 어떤 날은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날은 모르는 사람의 옆자리에서 어색하게 밥을 먹기도 한다. 누군가 나에게 “취미가 뭐예요” 라고 물으면 “취미로 버스를 탑니다”라고 대답을 했고, 상대방은 황당한 얼굴을 하고는 했다.

언젠가부터 버스에 오르면 기사님에게 인사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면 어떤 기사님은 답이 없고, 어떤 기사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기사님은 더 활기찬 인사를 돌려 주신다. 버스를 탈 때 카드리더기에서 들리는  “탑승입니다”하는 안내 음성만이 여행 가이드 대신 나를 이끄는 것 같다.

올라탄 버스에는 인생에 한 번도 본적 없을 것 같은 얼굴들이 가득하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뭐 어때. 갈 곳은 많은데.


띠- 하는 알림음과 함께 버스 문이 닫힌다. 이렇게 살다 죽을지도 모르지만, 기어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작가의 이전글 쓰다, 라는 행위의 의미 | 겪은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