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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콕 중 통역사 Oct 22. 2021

꺼지지 않는 불

09. 엄마가 되는 과정

영화 브레이킹 던을 보면, 늑대인간인 제이콥은 르네즈미에게 "각인"이 된다. 

이 "각인"이라는 것을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인은 늑대인간에게 있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감정이다. 그런데 반하는 것과 다르다. 누군가에게 각인된다는 것은 마치 그녀를 보는 순간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중력이 아니라 그녀가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안 중요하다. 그녀를 위해선 뭐든 하고, 뭐든 될 수도 있다. 친구, 오빠, 보호자…."


영화에 빠질 수 없는, 로맨틱하기도 어떻게 보면 유치하기도 한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나니, 나 또한 이 SF 로맨스 영화의 등장인물이 되었다. 






태어날 때 3.76kg라는 나름 큰 편에 속하는 딸아이를 낳느라, 수월하지 않았던 마지막에는 간호사 두 분이 내 배를 꾹꾹 밀어주셨다. 그렇게 아기가 쑤욱~하고 세상 밖에 나왔을 때, 나는 아기의 응애! 하는 소리와 함께 같이 으앙! 하고 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는데, 솔직히 말하면 벅찬 감동에서 나온 울음이 아닌 너무나 힘들어서 아기 낳는 동안 꾹 참았던 울음이 그제야 나온 것이었다. 

분명, 아기를 낳았다고 해서 바로 그 순간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울음을 그치자, 의사 선생님은 아기를 내 옆에 눕혀 주셨는데, 내 배로 낳았지만 낯선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쪼글쪼글하면서도 팅팅 부어있는 얼굴은, 남편을 닮았다고 하기에도 나를 닮았다고 하기에도 아니면 양가 부모님 중 한 분을 닮았다고 할 수도 없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포야~" 하고 속삭여 보았는데, 막 태어난 딸아이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을 눈을 부릅! 뜨며 내 쪽을 향해 쳐다보았다.  

그 반응을 보자, 그제야 '아, 내가 정말 아기를 낳았구나'하고 뇌가 인지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딸아이에 대해 이렇게 조금은 인지를 했던 내 뇌는, 퇴원하자마자 불한당처럼 쳐들어온 산후 우울증으로 뒤죽박죽 엉켜버려 한동안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재미있는 유행어가 아닌, 진심의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내 가슴에 안겨있는 아기를 쳐다는 보고 있었지만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울지 않고 잠든 밤보다는 울다가 잠든 밤이 훨씬 많았던, 아니 잠든 밤보다는 잠들지 못했던 밤이 훨씬 많았던 첫 한 달이 지나자, <인간은 적응하는 존재>라는 명언처럼 내 뇌 또한 새로운 생활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내 뇌가 적응을 하자, 산후 우울증은 다행히 점차 자취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난 아기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난생처음 논리적인 좌뇌형 인간이 되어서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따라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고, 시곗바늘의 위치에 따라 씻기고 잠을 재우며 그때까지도 풀리지 않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물음에 얽매여 있었다.




아기가 약 50일 정도 된 어느 새벽이었다.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기를 안고 젖을 주는데, 항상 눈을 감고 젖을 빨아대던 딸아이가 그날따라 호기심이 담겨있는 눈을 하고선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분명 배고파서 울어놓고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 자신을 안고 있는 커다란 존재가 너무나 궁금하다는 듯, 나의 눈썹, 눈, 코, 입 하나하나를 아주 찬찬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누군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꽤 오랜 시간 내 얼굴의 모양새를 관찰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마음에서 뜨거운 불이 일어났다. 아기가 마치 엄마의 모습을 그 작은 머리에 "각인"이라도 하는 듯 쳐다보는데,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응, 내가 엄마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난 엄마다. 

어쩔 땐 생각과 말의 순서가 바뀌어, 꼭 머리로 생각을 한 것이 말로써 실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말이 머릿속으로 들어가 생각을 만들어 낼 때가 있다. 


아기에게 내가 엄마라고 말로 "각인" 시켜주는데, 그 말들은 또다시 거꾸로 내 머릿속으로 들어가 내가 누구인지 "각인"시켜 주었다.  


영화 브레이킹 던처럼 눈이 마주치는 바로 그 순간, 각인이 되는 드라마틱한 장면은 없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엄마와 자식으로 각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길고 지루하고 험난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내었기 때문에 더욱더 강력한 것이 아닐까. 

수년이 흐른 지금도, 아기와 내가 처음으로 서로를 제대로 쳐다본 그 순간이 기억나, 그 새벽 내 마음속에 생겨난 뜨거운 불은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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