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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하 Dec 04. 2019

모호라는 이름의 불치병

화요일의 시 <화시, the flower season>

출처 unsplash @Le Lien


지난한 사랑은 벼랑 끝으로 사부작 떠밀렸다.

반짝이던 청춘을 안고 절벽 아래로 아득히 곤두박질 쳤다.

아픈 계절이 되면 시커먼 멍이 피어났다.

투명한 돌멩이가 세상에 낀 안개와 뒤엉켜 회색 물감으로 태어났다.

쨍그랑 깨진 것은 음계가 아니라 날 선 모서리다.

울어도 소리 나지 않는 병에 걸렸다.

불치병에 끝내 모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환자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지워지고 대신 존재라고 새로 쓰였다.


오늘의 나는 또 누가 놓쳐버린 그림자일까.

악수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정확하게는 건네었던 두 손을 잃어버렸다.

내려다 보니 주먹이 있어야 할 곳에 가위가 박혔다.

비틀거리는 몸에 습관처럼 취했더니 잔잔한 파도에도 격렬히 뒤틀렸다.

새벽으로 쫓겨 나는 대신 잠을 저당 잡혔다.

이슬이 쟁반 위에서 떨다 차갑게 식었다.

어제의 나는 비로소 내가 아니게 됐다.


까만 먼지로 휩싸인 도시에 사람들이 거닐고 있다.

족쇄같은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나와

발목이 자라 뿌리 박힌 나는

절대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이 된다.

전봇대 위에 벗어 놓은 껍데기가 휘날린다.

알맹이 없는 뒷모습을 난전에 팔아 화살을 샀다.

머뭇거리는 사이 화살에 날개가 돋아 도망갔다.

호주머니를 털었더니 날리는 먼지가 유일한 훈장이 되었다.


해바라기는 해가 떨어지면 애처롭다.

두 귀는 소음에 파묻혀 노래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메마른 날을 기다리다 너덜너덜한 걸레로 전락했다.

축축해진 등줄기로 흐른 식은땀은 엮지 못한 구슬이었다.

이제 남은 건 식탁 위에 흘린 밥풀이다.

채워도 끝을 알 수 없는 웅덩이가 집을 삼켰다.

오갈데 없는 심장 하나가 길바닥에 버려졌다.

쓰러진 자의 이름은 모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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