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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하 Nov 27. 2019

우리는 외롭다.

화요일의 시 <화시, the flower season>


기꺼이 내어  시간이 없어서 우리는 외롭다. 걸음마다 밟은 것은 그림자가 아닌 버려진 눈동자다. 지하에서는 모두 경주마가 되어 앞만 보고 달린다. 뒤쳐진 자의 얼굴에 시커먼 발자국이 새겨진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길에 잃어버린 소금이 널렸다. 뒤늦은 영혼들이 쫒아가느라 시큼한 바람이 인다.


어제의 묵살된 침묵은 칼날이 되어 바벨탑을 쌓아 올린다. 집 밖으로 쏘아 올린 화살은 태양을 관통시킨다. 맨홀 뚜껑이 열리고 송곳들이 날뛰기 시작한다. 뿜어져 나온 증기가 흩어지더니 그림자가 되어 어른거린다. 불명의 안개가 시야를 흐리고 감각을 퇴행시킨다. 주변이 흐릿하게 서서히 뭉개진다.


외로이 오방색의 봇짐을 안고 계단에 앉는다. 세간을 다 모아도 한 포대기에 불과하다. 사랑으로 계절을 품었지만 껍질만 남은 낙엽이 된다. 바스락 소리를 낸 것은 부서진 청춘이다. 미뤄둔 꿈은 파도에 휩쓸려 온데간데없다. 찢어진 종이 박스로 지은 집에 허름하게 홀로 누웠다.


둥지에 낳은 알을 깠는데 텅 비었다. 안에서 흘러나온 건 날이 선 비명이었다. 구멍 난 주머니로 눈동자가 맺힌다. 빨갛게 드러난 표피가 세상과 마주한다. 공깃밥 그릇에 채워진 것인 다른 이름의 공기였다. 뒤로 밀려난 것은 기약 없는 번호표를 잉태한다.


허리춤에 찬 시계가 쏜살같이 돌아간다. 걸음은 힘차게 성큼성큼 세상을 짓밟는다. 갈취당한 얼굴에 무표정만 우두커니 남는다. 깊게 파인 것은 말라 버린 우물이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새까만 비웃음 소리만 들린다. 멍하니 바라보다 쑥 빨려 들어간다.


소쿠리에 팔리지 않은 도라지만 한가득 남는다. 향기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떠돈다. 훗날 그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눈을 감고 입을 봉합한다. 더욱 세차게 걸음을 재촉한다. 봇짐을 버리니 어깨에 올려둔 세상이 가벼워진다.




#시 #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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