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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PD Sep 25. 2020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

홈쇼핑 심리학 에세이 (13)

직장인들에게 있어 점심시간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빡빡한 업무의 틈바구니 속에서 음식을 먹으며 동료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니까.


그런데 음식을 앞에 놓고도 선뜻 수저를 들지 못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광경도 가끔 보게 된다.


"다이어트 중인데.. 이거 먹으면 살찔 텐데..."


먹고는 싶지만 다이어트 결심이 깨지는 것에 대한 후배의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때, 누군가 얘기한다.


"괜찮아,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래."


그제야 헤헤하면서 저마다 숟가락을 들고 식사를 한다.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말은 21세기 명언집에 기재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말만큼 다이어트에 대한 마음의 빗장을 과감하게 열어젖혀주는 말도 다시없을 테니 말이다.

(어느 음식점 사장님이 이 말을 만든 것이라면 분명 그 집은 대박이 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를 한결같이 유지하고 싶은, 내적 일관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 모순되는 인지 요소를 동시에 품게 될 때 인지적 불균형 상태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한다.


이러한 불균형은 심리적 긴장을 유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해소하여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문제는 그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순됨을 정당화하는 사고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 합리화나 자기변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담배를 끊지 못하는 흡연자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더 큰 병에 걸리고 말 거야'라고 생각한다든가 지구 종말론을 믿던 사람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기도가 통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인지부조화 극복 심리를 이용한 상품이나 이벤트 또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콜라를 마시고 싶지만 다이어트가 염려되는 사람을 겨냥한 제로 콜라, 얼마 이상 구입하면 상품권을 지급하는 백화점 이벤트 등이 그 예이다.


칼로리가 0이라고 쓰인 콜라를 마심으로써 다이어트 결심을 해치지 않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고, 상품권을 지급받음으로써 불필요한 충동구매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럭셔리한 명품의 품질이 매우 좋다는 믿음 역시 인지부조화와 연관이 있다.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한 제품의 품질이 안 좋다면 그것을 구매한 행위는 너무나 바보 같은 행위가 되어버리니까 품질이 좋다고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실 인지부조화 심리를 겨냥한 가장 흔하면서도 파급력이 큰 사례는 홈쇼핑의 장기 무이자 혜택이 아닐까 한다.


매장에서 보통 3개월, 6개월 하던 무이자 혜택을 10개월, 12개월 이상으로 늘려버리니까 사고 싶지만 불필요한 지출이 아닌지 걱정하던 수많은 소비자들의 긴장감이 해소되었던 것이다.


'매달 적은 금액만 지출하면 되니까 오히려 이건 합리적인 소비야’라는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었다. 결국 장기 무이자 혜택은 홈쇼핑의 성장과 직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지부조화라는 편향 사례를 마냥 비난하고만 싶지는 않다.


비록 합리적이지 못한 사고 과정이라고는 해도 그러한 심리적 본능이 없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은 조그마한 잘못에도 스스로를 자책하며 상상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매우 각박하고 비정하게 돌아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밥은 굶어도 속이 편해야 산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마음 편한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다른 무엇보다 마음 편히 사는 것을 제일로 치던 선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마음이 편해야 사는 존재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일 것이다. 다이어트를 위해 억지로 안 먹고 있는 후배의 모습보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말에 웃으며 먹는 후배의 모습이 더 좋았던 까닭은.


그 모습이 또한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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