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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n 16. 2023

일주일의 열기를 식히는 금요일 밤

입사 14년차 차장의 두려운 속내

미나리님,


“복직이라니.”

저의 복직을 앞두고 있던 그날, 하늘공원 주차장에서 저를 폭 안아주며 미나리님이 말하셨죠. 회사에 나간지 3주 정도가 된 지금, 매일 밤마다 천장을 보며 생각합니다.

‘출근이라니.’


매일 아침 아이들을 챙기고 저를 챙기느라 이미 집을 나서기 전부터 땀을 뻘뻘 흘려요. 아직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한 것도 아닌데 더 바빠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게 가능한 걸까, 가능하니까 다들 다니는 거겠지, 그래도 나는 회사가 가까우니까 괜찮아, 할 수 있어, 등등 매일 비슷한 생각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섭니다. (오늘 저녁은 무얼 먹여야 하냐에 대해서도 아침부터 걱정하지요.)


복직한 동료에게 묻는 대표 질문이 있어요. 어떤 업무를 맡았냐. 그 질문에 제가 답을 하면 사람들의 눈이 하나같이 1.5배 커지고, 함께 커진 입을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요. 그리고는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봐요. 모두가 피하고 싶은, 다소 어려워 보이는 업무가 하나 있는데 저걸 누가 맡을까 싶었고, 드디어 그 담당자가 온 것이죠. 그게 바로 저예요.


제가 출근하기 전날 팀장님께서 제 책상을 손수 닦으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팀 막내가 이미 닦아놓은 깨끗한 책상을 다시 슥슥 닦으셨다고 해요. 그 짧은 몇 분 동안 팀장님께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저에 대한 믿음, 기대, 당부, 뭐 그런 것들이 들어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것이 없는 팀원의 책상을 굳이 닦아주시진 않았을 테지요. 저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또 제 자신에 대한 걱정도 슬며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 믿음과 기대와 당부에 부응할 수 있을까요.


미나리님, 저는 사실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내 밑천이 드러나겠군.’ 이런 생각을 하며 항상 겁을 냅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그럭저럭 별문제 없이 해왔는데 이번에야말로 난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겁을 먹는 것이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숨긴 채 출근하고, 숨기지 못한 채 울상으로 퇴근을 할 것입니다.


미나리님이 지난 편지에서 언급한 '하찮음을 견디는 시간'이라는 것은 사실 회사에서 허용되지 않지요. 제가 담당한다는 그 프로젝트 역시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문서상으로 이미 화려하고 거대하고 근사한 모습입니다. ‘미약한 시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제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부담감은 아마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회사는 저에게 월급을 쥐어주면서까지 그런 일들을 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저는 작고 단정한 뮈르달 책장을 보며 편안함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아도(그러면 안되지만), 책이 잘 팔리지 않아도(그러면 더더욱 안되지만), 애써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민낯 같은 책장이 절대 부끄럽지 않아요. 그럴듯해 보이도록 억지로 꾸며 화려하게 만든 제 일에 종종 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덜 부끄럽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금요일 밤입니다. 이번주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떠오르네요. 친하다고 믿었던 선배가 독기 가득한 눈으로 저에게 소리를 질렀던 어느 오후의 시간, 점심을 먹고 후배들과 회사를 크게 한 바퀴 돌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라본 푸르른 나무들,  술을 엄청 마신 다음날 아침 컨디션을 마시면서 비틀비틀 출근하던 길 등등 여러 순간들이 떠오르는 밤입니다. 그리고 복직하면서 굳게 마음 먹은 저의 다짐이 혹여 물렁해지지 않았는지도 되짚어봅니다. ‘회사일을 하면서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겠다’는 저의 다짐은, 역시나 너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문장에 불과했을까요.


미나리님께서 뮈르달의 여름 컬렉션으로 골라준 <밤>의 책들은 지난주부터 뮈르달 책장에 잘 누워있습니다. 따로 설명을 붙이진 못했지만 아마 뮈르달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저희의 의도를 찰떡같이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해요. 이번 주말에는 저도 그 책들을 읽으면서 고요하고 차분하게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밤처럼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여름과 밤과 책은 참 잘 어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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