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에 코로나 19 전염병이 확산되니 중세 시대 유럽을 휩쓸고 간 페스트도 생각나고 하룻밤 사이 사망자가 천 명을 넘으니 삶과 죽음이 무척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올봄 지구촌의 비극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끔찍한 악몽이 현실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지구촌이 재앙을 맞이하니 지난 세월을 반추해본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종사하다 대학 시절 만난 남자와 인연으로 결혼을 해 두 자녀를 출산하고 자녀 육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집에서 지냈다. 한 남자와 두 자녀의 특수 교육을 위해 뒷바라지하며 내 인생은 흘러갔다. 하늘이 준 신성한 의무를 다하니 내 머리카락은 하얗게 하얗게 변하더라.
평생 권력에 파워에 돈에 명예에 커리어에 욕심을 부려본 적도 없다. 럭셔리 물건을 쇼핑하려고 욕심부린 적도 없고 남들의 호사한 삶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나는 나.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내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를 다했다.
두 자녀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서도 나의 최선을 다했고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 내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렸고 무에서 시작해 우리 집에 경제적인 안정이 된 후 60평대 아파트로 옮긴 바로 후였다. 두 자녀 교육 의무가 내 어깨를 짓누르고 가정 형편은 늘 복잡하니 친구들과도 자주 만날 수도 없었고 명품백을 사본 적도 없다. 커피 한 잔에 2000원도 비싸다고 안 마셨다. 그렇게 살면서 아파트를 구입해드렸다.
결혼 후 매주 토요일마다 방문해 함께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할 때도 가까이 사는 내 몫이 아주 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 무렵 두 자녀는 특별 레슨을 받고 있어서 엄마의 역할과 며느리의 역할이 겹쳤다. 내게 결혼은 폭풍 같은 의무 가득했다.
아내의 자리는 얼마나 힘겨웠던가! 대학 시절 만난 남자의 뒷바라지를 얼마나 고단했던가. 대학 시절 만난 것을 포함하면 경제적 안정이 되기까지 수 십 년 세월이 흘렀다. 과정 과정 필요한 모든 것은 아내의 몫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도 복사비가 없다고 하면 달려가고 버스비가 없다고 하면 달려가고 그때그때 요구하는대로 들어줬다.
어느 날 갑자기 거액의 사업 자금을 1주일 만에 현금으로 가져오란 말에 따라 매일 눈만 뜨면 얼마나 많은 낯선 은행을 방문했던가. 정말 어렵게 어렵게 사업 자금을 마련했다. 일부는 하늘로 떠난 친정아버지에게 도움을 받고 나중에 갚았다. 사업을 시작하려고 빌딩을 짓기 시작할 무렵 한국에 IMF가 터져 은행 이자는 하늘로 올라만 갔다. 매달 갚아야 할 은행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니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돈 많은 사람은 높은 은행 이자 받으면 기쁨이 몇 배가 되던 시절 거꾸로 은행에서 대출받은 자는 슬픔이 몇 배가 되었다.
이사는 또 얼마나 자주 했던가! 휴전선 근처 전방에도 가서 1년 동안 살았다. 매일 밤 대포와 탱크 소리 들리는 전방 물가는 얼마나 비싸던지. 우리가 살 집도 내가 구했다. 전방은 집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임대료는 비싸고 살만한 적당한 집이 드물었고 아파트 전세는 비싸기만 했다. 군인들이 살던 지역이라 생필품 구입도 어려워 5일장에 가서 장 보고 식품비를 아끼며 참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그 무렵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린아이들 피아노 레슨을 해주고 레슨비 받아서 생활비에 보탰다. 새벽에 테니스 레슨 받으러 다니고 틈틈이 책을 읽었다. 전방 근무 마치고 고향에 내려온 후 자주 이사를 다녔다. 아주 오래전 포장 이사가 없었다. 혼자서 많은 일을 했다.
그뿐인가! 엄마의 자리는 또 얼마나 힘겨운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본 바이올린 레슨을 받고 싶었지만 수 십 년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 후 교직 발령을 받은 후 첫 급여를 받아 레슨을 받기 시작했지만 첫아이 임신으로 레슨을 중지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바이올린 레슨 받는 학생은 아주 드물었다. 당시 아버지는 공무원. 급여가 작으니 레슨비 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어서 먼 훗날 대학 졸업 후 첫 급여받아 레슨을 받았다.
그때 바이올린 선생님이 나중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다시 레슨 받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여자에게 임신과 육아는 상당히 무거운 과제다. 그 바이올린 선생님 말씀대로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방과 후 반에서 레슨을 시작했다. 그 무렵 어린 아들은 누나와 함께 레슨을 받고 싶다고 펑펑 울어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은행에서 대출받은 이자 갚기도 눈물겨운 IMF 시절. 어렵고 힘든 형편에 방과 후 레슨을 시작했지만 한 두 번 레슨을 받고 프라이빗 레슨으로 바꿨다. 내 의사가 아니고 학교 선생님 의사였다. 재능 많아서 프라이빗 레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내가 지고 말았다.
어린 두 자녀가 바이올린 프라이빗 레슨을 받기 시작하니 엄마 역할이 컸다. 보통 아이들은 1주일에 2회 레슨 받지만 우리 집 형편이 무척 복잡하다고 하니 1주일에 1회로 하고 두 명의 자녀가 각각 30분씩 받기로 했다. 그러니까 아주 많은 레슨비를 줄인 셈이다. 1주일에 한 번 받는 레슨 준비는 엄마 몫이 아주 컸다. 그 무렵 두 자녀 피아노 레슨도 엄마가 도와줬다. 1년 정도 레슨을 받은 뒤 콩쿠르에서 수상을 한 뒤 독일에서 유학한 분에게 옮겼다. 특별 레슨을 시작! 두 자녀와 난 전쟁터에서 살았다. 준비해야 할 연습 양이 무척 많았다. 그 레슨을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두 자녀와 함께 보냈고 10년 이상 레슨을 받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을 했고 엄마는 옆에서 연습을 지켜보았다. 잔소리도 쉬지 않고 했다. 당연 아이 입장에서 보면 엄마는 악마였는지 몰라. 그 힘든 길을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거 같다. 단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교직에 종사하다 사직서를 제출할 때는 아이 아빠와 약속을 했다. 두 자녀 양육 후 내가 원하는 길을 가겠노라고! 두 자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가자 내게도 조금 빈 시간이 주어졌다.
딸아이에게 영어 회화 수업을 듣게 하려는데 너무 비싸 충격을 받았다. 차라리 내가 배우고 말지. 당시 영어 학원 1달 수강료가 5만 원 나중 5만 5천 원 나중 6만 원으로 인상되었던가. 뉴욕 물가에 비하면 얼마나 저렴한가. 한국도 장점이 있다. 영어 회화 수업에 가면 다양한 사람들 만나 다양한 삶에 대해 듣곤 했다. 삶이 다 다르더라. 자녀들 고액 과외시키고 매일 외식하면서 지낸 분도 있었다. 나의 경우와 하늘과 땅 차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노라면 복잡한 일 잊어버리고 웃으며 집에 돌아와 내게 주어진 일을 열정적으로 했다.
두 자녀 모두 바이올린 레슨을 받을 무렵 나도 다시 레슨을 받고 싶었다. 바이올린 레슨을 받다 중단했으니 다시 바이올린 활을 들 수도 있으나 나이가 드니 첼로의 저음의 매력에 끌렸다. 집안은 복잡한 상황이니 고민하다 중고 악기점에 달려가 중고 첼로를 구입했다. 프라이빗 레슨 받을 형편이 안 되니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가 사업이 안정이 되자 경제적인 여유가 생겨 나도 프라이빗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책과 예술을 사랑했고 틈만 나면 책을 읽고 클래식 기타반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또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었다. 매달 급여를 받으면 책과 음반을 구입했다. 캄캄하던 세상 나를 위로하던 책과 음악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늘 고민을 했다. 평생 성공과 돈이 뭔지 몰랐다.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그때도 학생들은 졸업 후 직장 구해서 일하고 돈 많이 버는 집안 좋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중대하게 생각했다. 난 몇 가지 외국어와 악기와 운동과 그림 등을 배우고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을 했다. 또 해외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학교 공부하고 클럽 활동하고 아르바이트하니 1초가 귀하던 대학 시절. 가끔은 친구들도 만나니 더 바빴다. 잠시도 생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흘러 나의 꿈은 하나하나 부화해갔다. 교직 발령받아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하고 그 후 첼로 레슨을 시작하고 틈틈이 운동도 했다. 집에서 두 자녀 교육에 힘쓰니 주로 새벽과 한 밤중 운동을 했다. 외국어 수업은 내게는 늘 매력적이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새로운 문화를 알게 되고 세상이 넓혀져 간다. 그래서 외국어를 배우고 싶었다.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우기도 하고 불어와 중국어 수업을 학원에서 들었다. 두 자녀 특별 레슨 시키니 엄마 역할이 무척 바쁘고 힘들었지만 방송 통신 대학에서 중문과 불문 과정을 졸업했다.
두 자녀 레슨으로 무척 바쁘니 모임에 가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모임에 가면 시댁 자랑, 남편 자랑 아니면 흉보기, 자녀 교육과 쇼핑과 여행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모임에서 만나는 회원의 남편은 같은 직업군에 속해도 각각 형편이 달랐다. 우리 집은 너무너무 어렵고 복잡했다. 아이 아빠 선후배들 삶도 천양지차였다. 자녀들 고액 과외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안 척도 안 하고 난 언제나 내 방식대로 했다. 내 형편에 맞지 않으면 눈을 감았다. 망년회에 가니 미국에 조기 유학을 보낸 선배 부인도 있었다. 수 십 년 전 평균 1년 5천만 원 정도 든다고 했다. 음악 교육 아닌 보통 아이 조기 교육비가 그렇고 그밖에 추가 비용도 든다.
서울 88 올림픽 후 여권이 발급되고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무에서 시작한 우리 집 형편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수많은 위기 위기를 넘기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사라지자 런던, 파리, 베를린,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로마, 베니스, 프라하, 동경, 시드니 등으로 여행을 떠났다. 어린 두 자녀 교육을 위해 뮤지엄이 들어간 스케줄을 골랐다. 언제나 돈의 가치를 생각했다. 필요 없는 곳에는 한 푼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비단 돈뿐만이 아니다. 항상 시간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다. 평생 무료하거나 지루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배우는 삶을 원했으니까. 새로운 것을 배우며 활기를 찾았다.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져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첼로 레슨을 받다 프라이빗 레슨으로 옮기고 바흐 무반주 조곡을 레슨 받을 무렵 나의 첼로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안개에 가린 삶의 비밀이 풀어지고 7천 마일 떨어진 뉴욕에 어린 두 자녀 데리고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니 보통 가정과 극으로 다르다. 평범한 가정이라도 40-50대가 되면 안정을 하지만 우리 집은 40대 중반 세상의 한 복판 뉴욕에 와서 교육받고 사니 하루하루 눈물바다였다.
내가 뉴욕에 온 것은 은행에서 대출받은 빚 갚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제 겨우 돈 걱정 안 하고 살만한 형편인데 머나먼 나라 낯선 도시로 떠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니 하루하루 눈물이 앞을 가렸다.
캄캄한 세상에서 세상의 한 복판으로 나온 것도 생의 위기를 맞이할 때다. 내가 뉴욕에 간다고 하니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어코 오고 말았다. 뉴욕에 오는 것도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던가. 지옥 같은 재판이 1년 동안 진행되고 끝나자마자 서점에 가서 토플책 사서 몇 달 공부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고속버스 타고 서울에 가서 토플 시험 보고 집에 돌아오면 한 밤중. 죽을 맛이었다. 40대 중반 어느 날 갑자기 토플 시험 봤는데 원하는 성적이 쉽게 나와?. 아...
어렵게 대학원에 진학할 성적 받아서 유학원에 갔는데 비용이 너무 비싸서 힘없이 집에 돌아와 혼자서 인터넷에서 유학 정보 알아보고 서류 보내 대학원에서 합격 레터 받고 어렵게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받고 짐 정리하고 뉴욕에 왔다. 실은 합격 레터 받고도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 대학원에서 외국어로 공부할 생각 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기적처럼 대학원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그 보다 더 힘든 것은 대학원 공부 과정. 죽음 같았다. 단 한 사람의 친구만 있어도 위로를 받았겠지. 혼자서 세계 전쟁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 입시생 두 자녀도 죽을 만큼 고생을 하고 나도 고생을 하고 가족이니 한 배를 탔다. 매일 아침 두 자녀 학교에 픽업을 하고 학교 수업이 마칠 무렵 두 자녀 데리고 갔다. 대학원 공부하면서 살림도 하고 1초가 귀하던 시절.
뉴욕 맨해튼 문화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긴이 흐른 후다. 공부를 마치고 미국인 회사와 대학 연구소에서 일하다 그만두고 매일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서 갔다. 단 한 사람도 내게 뉴욕 문화에 대해 말해 준 사람이 없었다. 낯선 도시를 알고 싶어서 매일 노크를 했다. 열려라 참깨! 열려라 세상! 하고 주문을 외웠다. 거리에서 노란 바나나 사 먹고 낡은 가방에 책 한 권 담고 뉴욕 맨해튼 거리를 돌아다녔다. 뉴욕 문화 예술 정보는 얼마나 힘들게 모았는가. 아직 출판사도 찾지 못했다. 맨해튼에 가서 커피 한 잔과 노란 바나나 사 먹고 종일 싸 돌아다녔으니까 하루 약 3불 정도 지출했다. 오페라 관람과 카네기 홀 공연료를 제외하고.
평생 내가 원하는 삶을 추구했고 내 가치관대로 살았다. 하늘처럼 물가 높은 뉴욕에서 엄마 혼자 두 자녀 교육하니 함께 고생을 많이 했다. 난 지금 눈 감아도 소원이 없을 정도로 나의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인생은 한 번 뿐이니 생을 즐겨야 한다는 욜로족이 탄생했다. 현재의 삶에 가치를 두고 현재를 즐긴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자신의 인생을 즐긴다고! 베이비붐 세대와 너무나 다른 삶을 사는 욜로족. 소비문화가 다르더라. 우리 세대는 대학 시절 100원짜리 커피도 감사함으로 마시고 행복했다. 그런데 요즘은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커피값은 얼마나 비싸. 비싼 고급 커피도 부담 없이 마시는 욜로족들.
반대로 파이어족이 있다. 미래를 위해 기꺼이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아끼고 아끼며 산다. 일찍 은퇴하고 노후를 즐긴다는 파이어족.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 수전노처럼 한 푼 한 푼 아끼며 절약하며 산다고.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난 욜로족도 아니고 파이어족도 아니다. 아들에게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파이어족을 고른다고 하더라. 난 두 자녀 교육을 위해 일찍 사직서를 제출하고 집에서 지냈지만 아이 아빠 내조를 위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내조를 했고 두 자녀 교육을 위해 끝없이 헌신을 했다. 그러다 보니 오십이 넘어버렸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생을 즐겨야 한다는 욜로족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일찍 은퇴해 삶을 즐긴다는 파이어족도 아니다. 일찍 은퇴했지만 내 생의 굴레는 언제나 의무 가득했으니까. 숭고한 내 의무를 다 마치니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더라.
가진 거 없지만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성실히 살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1940년대 완공된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30살이 넘은 아파트 공동 세탁기 사용하면서도 감사함으로 뉴욕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서 상상도 못 한 현실에도 감사하다. 우리 가족이 사막 같은 뉴욕에서 오아시스를 찾고 있다. 그동안 받은 고통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부분이 99.99%다. 정말 행복한 것도 표현하기 어렵고 정말 슬픈 것도 표현하기 어렵지. 삶은 역경과 시련의 연속이더라. 눈물 속에도 꽃은 피겠지. 하루하루 감사함으로 열정적으로 살다 보면 어제 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올 테고 내일보다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 희망을 갖는다. 희망과 꿈과 열정으로 내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눈물이 앞을 가려도 열심히 살자!
3.25 수요일 밤 뉴욕 오두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