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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수 Apr 16. 2020

삶이 뜻대로 안 되니 뉴욕 문화 탐구 시작

정말 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지난 3월 초 메트에서 모차르트 오페라를 감상했는데 코로나 19로 뉴욕이 잠들어 버려 그 후로 오페라 공연(라이브) 관람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언제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지 모르니 자꾸 지난날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맨해튼 배터리 파크에서 본 석양, 오래전 스테이튼 아일랜드 석양 사진은 없어서 대신 올린다. 



꽤 오래전 일이다. 어느 여름날 지하철을 타고 아름다운 석양을 보러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가는 주황색 페리를 타려고 플러싱 메인스트리트에서 7호선 지하철을 탔는데 갑자기 몸에 마비 증상이 오기 시작 그랜드 센트럴 지하철역에서 환승해야 하는데 고통이 너무 심했다. 지하철에서 내리기도 힘든 상황이라 이러다 죽겠다 싶은데 과연 석양을 보러 갈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만약 정말 죽게 된다면 어쩌면 그날이 마지막으로 석양을 볼 수 있게 되니 아픈 몸으로 계단을 올라가는데 갈수록 고통이 더해갔다. 


맨해튼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상황. 전화를 하면 달려올 친구도 없으니 더 슬펐다. 그런다고 두 자녀에게 엄마가 아프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아프다고 말하면 걱정할 게 뻔하니까.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참고 참고 참고 계단을 올라가 맨해튼 남쪽 끝 볼링 그린(Bowling Green) 역에 가는 지하철에 환승했다. 그런데 볼링 그린 역에 도착하자 기적이 일어났다. 거의 마비된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완전 정상은 아니었지만 고통이 조금씩 사라지니 살 거 같았다. 


그날 맨해튼 남쪽 끝에서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가는 주황색 페리를 타고 아름다운 허드슨 강 석양을 바라보았다.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갑자기 몸이 마비가 되어 고통이 너무 심하니 곧 죽는 줄 알다 살아난 그날 이후로 차츰차츰 맨해튼 문화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보물섬을 발견했지만 지금은 코로나로 보물섬이 멈춰버렸다. 그러니까 뉴욕이 뉴욕이 아니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자유를 찾아서 방랑하던 시절이 그립다. 삶이 내 뜻대로 안 되니 맨해튼에서 문화 탐구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뉴욕에 왔다. 맨해튼에 세상 부자들이 모여 사는 것도 몰랐다. 40대 중반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어린 두 자녀와 함께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수많은 작가들도 뉴욕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 뉴욕 명문가 집안에서 탄생한 작가 허먼 멜빌도 고생을 많이 했다. 중학교 시절 재밌게 읽은 <백경>의 저자가 뉴욕과 인연 깊은 줄도 모르고 왔는데 먼 훗날 알게 되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레이먼드 위버가 극찬하는 평론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백경>은 재조명되었다. 


미국 서부 명문 스탠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던 존 스타인벡 역시 뉴욕에 와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 빌딩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옆사람이 사고로 죽은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고.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 시기 미국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수상한 작가가 막노동했다고 한국에서 상상도 못 했다.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 역시 뉴욕에 와서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너무 가난하니 장인 될 분이 딸을 줄 수 없다고 결혼을 반대했는데 나중 결혼했다. 부인을 무척 사랑했던 마크 트웨인 작가는 하얀색 정장을 사랑했나. 맨해튼 유니언 스퀘어 반스 앤 노블 북카페 벽에 하얀 정장을 입고 담배 피우는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앵무새 죽이기>로 명성 높은 하퍼 리의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미국 Alabama (앨라배마) 주 먼로빌에서 탄생했고 <티파니의 아침을 >을 집필한 트루먼 카포티와 어릴 적 친구다. 훗날 하퍼 리는 작가의 꿈을 좇기 위해 대학 마지막 학년에 자퇴, 1949년 뉴욕으로 이주했고 항공사 예약창구 직원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병행했다. 뉴욕 맨해튼 생활이 힘들 때 어릴 적 친구이던 트루먼 카포티가 생활비를 도와줬다고 한다. 


그렇게 명성 높은 수많은 작가들도 뉴욕에 와서 죽도록 고생했는데 40대 중반 낯선 나라에 어린 두 자녀 데리고 와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도전일까. 부부 함께 이민을 와도 힘든데 어린 두 자녀 데리고 온 날개 하나 부서진 싱글맘의 삶은 보통 가정과 극으로 다르다. 미국에서 탄생하면 언어와 신분 문제가 따르지 않는다. 이민자들은 두 가지 장벽이 하늘처럼 높다. 이민 생활은 하루아침에 안정되지 않는다. 눈물을 먹고 고통과 싸우며 사는 이민자들이 참 많다. 물론 소수 예외도 있다. 소수 돈 많고 재능 많은 사람들은 귀족처럼 사는 경우도 있다. 


미국과 뉴욕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 줄리아드 음악 학교가 맨해튼에 있다는 것을 알고 뉴욕에 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두 자녀에게 더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 뉴욕에 왔지만 삶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끝도 끝도 없는 장벽을 부수고 부숴야만 하나의 문이 열리는 이방인의 나라. 세상 부자들이 사는 맨해튼이 뭔지도 모르고 와서 이민자로서 맨 아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니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민자들 삶이 더 가깝게 보였다. 단 한 명이라도 우리 가족을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면 삶의 무게가 조금 더 가벼웠을 텐데 단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뉴욕은 우리에게 황무지였다. 사하라 사막 같은 뉴욕에서 희망의 씨를 뿌리고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자본주의 나라 미국은 극과 극으로 빈부 차이가 난다.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 삶은 과거 노예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생각도 든다. 막노동하며 번 돈은 비싼 렌트비와 식품비도 부족하고 주거 비용이 하늘처럼 비싸니 여러 명이 좁은 공간에서 사는 경우도 많다.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 알츠하이머와 치매 전문 양로원에서 만난 디렉터 따님은 맨해튼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는데 수입이 너무 작고 렌트비가 비싸니 4명이서 아주 좁은 공간에 산다고 말했다. 그렇게 룸메이트랑 사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귀족은 날마다 유람선을 타고 파티를 할 거 같다. 맨해튼은 비싼 레스토랑이 아니라도 마트에서 사 먹는다. 지금은 코로나로 세상 문이 닫혀 버려 암담하다. 언제 다시 문이 열릴까. 


돌아보면 힘들고 힘든 시절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면 천국에 산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많고 입을 열면 충격을 받는다. 공연 예술과 그림을 좋아하니 자주 문화 나들이를 하니까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짐작한다. 천만에. 평생 지옥의 터널을 걷는 기분이다. 가슴 아픈 추억은 꽁꽁 얼려서 냉동고에 넣어 두었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냉동된 추억들이 살아날까. 



스테이튼 아일랜드 가는 페리에서 담은 석양 사진은  몸이 마비된 날 찍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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