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살다 보니 별 일을 다하는군
5월쯤 가지 모종 2개를 텃밭에 심었다. 오일장에 가서 상추랑 깻잎, 청양고추 모종도 함께 사서 정성껏 심었다.
주위 조언도 얻어 텃밭의 돌도 고르고 비료도 듬뿍 줘서 묵히고 그랬으니... 이번엔 탐스러운 보라색 가지가 주렁주렁 열리려나.
기대를 잔뜩 하고 매일 들여다보는데...
근데 안 자란다.
이상하다. 해도 잘 비추고, 물도 듬뿍 주는데... 함께 심었던 상추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 메뚜기 같은 애들이 잔뜩 뜯어먹고도 한참 식탁을 풍요롭게 하고 웃자라 뽑을 때가 다됐고, 깻잎은 김치까지 담아먹었고, 고추 모종도 남의 집 부끄럽지 않을 만큼 기를 쓰고 고추를 뽑아내고 있는데...
이 놈의 가지는 꽃은커녕 키도 안 큰다.
남편에게 말했다.
"의심이 가네."
"뭐가?"
"가지 품종이 미니인가?"
"설마...?"
"그럼 왜 안 자라지? 플라스틱을 사다 심었나?"
"....?"
그런데 오늘 아침에 남편과 산책 나갔다, 이웃집 유자 아저씨가-그 집 불독 이름이 유자다.- 가지고 가 먹으라고, 그 집 텃밭의 커다란 가지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툭 끊어주신다.
기분이 묘하다.
아저씨가 상추랑 깻잎 따다 먹으라 할 때는 난 당당히 말했다.
"저희도 상추와 깻잎 심었어요."
근데, 가지 가져다 먹으라 할 때는 그 말이 안 나왔다.
저희도... 가지... 심... 었어... 요. 아니, 안 심었나...?
텃밭에 자라지도 않고 덜렁 이파리 몇 개 붙은 초라한 가지 모종이 생각나 침을 꿀꺽 삼키고, 따준 가지와 못생긴 정체불명의 오이 같은 걸 받아 들었다.
그걸 손에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오는데 왠지 기운이 쏙 빠진다. 옆에서 함께 걷던 남편이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이를 앙당 물고 말했다.
"이참에 참교육을 시켜야 돼."
"누구를?"
"누구긴 누구야? 우리 집 가지지."
"...?"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모자를 벗어놓고 얻어온 가지를 들고 텃밭에 나갔다 한참만에 돌아왔다. 그리곤 내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아마 남편은 옆집에서 얻어온 가지를 내보이며 우리 가지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잘 봐. 이것들아! 너희가 진심 가지라면 이런 걸 주렁주렁 매달아야지. 지금 너희가 이러고도 가지냐? 내 참 동네 창피해서... 그러니까 말해보라고! 내가 너희들한테 비료를 안 줬어? 물을 안 줬어? 아니면 사랑을 안 줬어?"
한참 손에 보라색 가지를 들고 우리 집 가지를 혼냈을 남편을 상상하니 풋 웃음이 난다.
아무래도 제주 생활이 한가해도 너무 한가하나보다. 가지한테 참교육이나 시키고 앉아있고... 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