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준비] 팔랑귀 엄마
여행루트 정하기

그냥 떨... 떨려도 한 번 가보자

by 글쓰는공여사

“십 년을 일했으면 일 년은 아니더라도 두 달은 쉬어줘야 인간이지. 그것도 안 쉬어주면 그게 인간이야?”


여름휴가 두 달 얻겠다고 인간의 조건까지 끄집어내 가며 침 튀기는 나를,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


“그래. 쉬어.”


전의를 불태울 틈도 없이 상대가 흰 깃발 흔들고 항복하니, 김이 빠진다. 이제 휴가도 얻었으니, 인간답게 휴식도 취하고, 엄마답게 엄마 고픈 딸내미와 좋은 시간도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그게 또 고민이다.


딸내미 학교 간 사이에 먼저 가스레인지 후드 기름때부터 벗기고, 꾀죄죄한 고슴도치 칫솔 목욕도 시키고, 신혼 때 산 옷도 좀 갖다 버리자. 그러다 딸내미가 집에 돌아오면 함께 피자도 먹으러 가고, 영화도 보러 다니고......


잠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이상하게 휴가 계획에 설렘보다 우울한 느낌이 스민다. 이건 뭐지? 결국 오전엔 가사도우미, 오후엔 베이비시터네. 갑자기 ‘인간의 조건’이 또 생각난다. 엄마이면서 인간이기 참 힘들다. 십 년이나 뼈 빠지게 일했는데, 겨우 가사도우미와 베이비시터가 두 달 휴가 계획이라니. 없는 기운마저 다 빠져나간다. ‘엄마 인간’ 조건을 충족시키는 휴가를 고민하던 나에게 남편은 가볍게 툭 뱉는다.


“딸내미랑 유럽여행 다녀오지?”


‘서울에 바람이나 쐬고 오지?’라고 말하는 줄 알았다. 유럽으로 여행을 딸내미와 다녀오라고? 엄마 인간 조건 충족에 그보다 더 매혹적인 제안은 없다. 마음이 훅 끌린다. 남편의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 말을 순순히 따르기로 한다. 이번 여름휴가는 딸내미와 유럽여행 다녀오는 것으로~ 야호!


‘야호!’를 외치면서도 7할은 기쁨과 설렘, 3할은 불안과 걱정이다.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명료하게 알기에, 3할은 순식간에 지평을 넓히며 결론인 후회막급으로 치닫는다. 난 자타 공인 길치에 동서남북 방향치다. 핸드폰도 겨우 다루는 기계치에, 몸이라고는 평생 써본 적 없는 약골에, 비행기 타는 것도 무섭다. 거기다 할까 말까 갈까 말까 살까 말까 결정 장애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불안 장애는 수준급이다.


내 긴 인생에 나 혼자 1박 2일 여행도 안 가본 사람인데, 열세 살 사춘기 딸내미 안전까지 책임지고 유럽여행을 다녀오라고? 노노 노노노! 그냥 고슴도치랑 딸내미랑 집에서 릴랙스 하며 두 달 평온한 시간 보내면 안 될까? 목구멍까지 기어 나오는 말을 딸내미 의견이나 한 번 물어보고 뱉자고 꾹꾹 눌러놓는다.


“딸냄! 엄마 휴가 얻어서 딸내미랑 유럽여행 갈까? 아니면 집에서 피자 먹으며 영화 볼까?”


엄마 입에서 쏟아지는 낯선 단어들을 딸내미는 제대로 이해는 한 걸까? 엄마 휴가? 유럽여행? 딸내미는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딱 한 번 끔뻑거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reading comprehension을 끝낸다.


“난, 너무 좋아. 가고 싶어. 엄마랑 유럽여행.”



외롭다, 쓸쓸하다, 엄마 고프다 그렇게 신호를 보냈건만 모른 척하던 엄마 입에서, 휴가와 유럽여행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제는 결코 다시 담을 수 없는 말을 뱉었으니, 후회막급이고 뭐고 그냥 가야 한다. 딸내미를 더 이상 실망시킬 수는 없다. 남편의 탁월한 상황 정리 능력과 딸내미의 열렬한 동참 의지에 힘입어, 유럽여행에는 부적합한 오만가지 나의 성품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진짜 가기로 한다.


‘일만 죽어라 하고 언니 오빠만 챙기던 엄마니까, 언제 유럽여행이고 뭐고 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할지도 몰라.’ 딸내미는 아침저녁 의심을 가득 담아 엄마 눈치를 살피더니, 대한항공 예약 티켓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함빡 웃어 보였다. 학교 친구들에게 유럽여행 소식을 수줍게 알리고, 딸내미는 부러움에 가득 찬 친구들에게 등짝을 잔뜩 얻어맞고 들어와서도 헤헤거렸다.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와서 딸내미는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우리 여행 간다니까 엄마, 아빠, 나 셋 다 놀라운 사람들이래. 엄마는 아빠 없이 딸만 데리고 무려 35박 여행을 가려고 결심한 게 놀랍고, 난 13살 나이에 35박 유럽 여행을 간다는 그 자체가 놀랍고, 아빠는 35박을 혼자 있겠다고 결심한 게 놀랍대."


얘기를 듣고 보니 남편이 가장 놀라운 사람이다. 그래도 남은 사람 어찌 지낼까 고민할 만큼 마음의 여유는 없다. ‘말은 뱉었고, 비행기 예약까지 했으니 가자. 가보자.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딸내미가 저리 좋아하니, 잘 될 거야, 괜찮을 거야, 잘할 수 있을 거야, 뭔 일 있을라고...’ 내가 아는 긍정의 말을 모두 긁어모아 나도 용기라는 것을 내본다. 그냥 떨... 떨려도 한 번 가보자!


7월 9일에 출발이니 4개월 정도 준비할 시간이 남았다. 누군가는 여행을 미리 ‘공부’하고, 자기만의 100쪽짜리 여행 자료집을 스프링 제본해서 준비하는 지나친 열정과 완벽을 보였지만, 우리는 좀처럼 머리를 맞대고 계획 짤 시간도 내기가 어려웠다.


딸내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출근을 하고, 내가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딸내미는 이미 쌕쌕거리며 잠자기에 바빴다. 그래도 뭔가 도움을 줘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었던지, 딸내미는 이번 주말에는 꼭 도와준다고 큰소리 땅땅 치더니, 컴퓨터 켰다 껐다 몇 번 하고, 친구와 떡볶이 먹으러 간다면 쪼르르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넘쳐나는 여행 정보도 문제였지만, 나에게 도움되는 정보를 찾아 분류하고 정리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나사 풀려고’ 가는 여행이 또 다른 ‘나사 쪼이기’가 되어갔다. 어떤 나라와 어떤 도시를 얼마만큼 머물면서 여행할지 결정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내가 충분히 ‘노오력’만 하면 좋은 대학도 가고, 좋은 직장도 가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논리에 빠져있던 때라, 여행도 그렇게 ‘노오력’해서 준비하면 돈도 아끼면서, 지친 심신도 쉬면서, 딸내미와 가까워질 거라 믿었다. 여행은 우연을 맞으러 일부러 떠나는 길이라는 것을, 여행에서 마주치는 변수를 미리 통제할 수 없으니, 계획은 짧게, 경험은 다양하게 겪어야지 마음 다잡으면 된다는 것을, 여행 떠나기 전에는 몰랐다.

매일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며 루트를 그렸다. 어느 날은 밥상에 숟가락 놓으면서 ‘딸냄~ 체코 프라하에 가서 붉은 기와지붕 사이를 손잡고 걸어보자.’ 했다가, 다음 날에는 딸내미 방문 벌컥 열고, ‘터키 가서 열기구도 타고, 동굴호텔에서 자보자.’ 했다. 어느 날은 된장국 퍼 담으며 스페인과 크로아티아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가, 참다못한 딸내미의 칼을 맞았다.


(비장한 목소리로) “엄마, 오늘은 결정했어?”

(목소리가 적어지면서) “아니.”

(다소 저돌적인 목소리로) “그러니까 엄마, 진짜 엄마가 가보고 싶은 나라가 어디야?”

(더욱 기가 죽으며) “글쎄...엄만, 아직 못 정했어.”

(기가 막힌 듯) “난 엄마 귀가 그렇게 얇은 팔랑귀인 줄 미처 몰랐다니까. 가보고 싶은 나라가 어딘지 잘 생각해보고 그냥 정해. 욕심부리지 말고. 난 해리포터 만나러 런던, 해산물 먹으러 크로아티아, 가우디 건축물 보러 바르셀로나 가고 싶어.”


엄마 귀가 줏대 없이 흔들리는 팔랑귀라는 말을 그리 쉽게 뱉다니, 우리의 마음 거리가 멀긴 멀다. 그래도 언제 그런 중요한 결정을 다 했는지, 대견하면서도 이럴 때 보면 딱 지 아빠다. 이 집에서 혼돈의 늪에 자주 빠졌다 나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팔랑귀라니

딸내미 말이 맞다. 루트에 이렇게 욕심을 부렸다가는 유럽 여기저기 발자국만 찍고 인증 사진 찍으면서 36일을 가득 채우고 말겠다. 여행 끝나고 병원에 링거 꽂고 ‘근데, 딸냄, 여기는 어디냐?’ 인증 사진 가리키며 다녀온 길 짚어보기 전에, 욕심 한 켠을 도려내고 루트를 확정 지었다. 크로아티아와 스페인 둘 다 가기에는 힘든 일정이라, 해산물은 스페인에서 먹기로 하고, 크로아티아를 버리고 스페인을 추가로 넣었다.


영국 런던 - 스페인 바르셀로나 - 이탈리아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 스위스 인터라켄, 루체른 - 프랑스 파리


36일 여행하는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씩 드러날 텐데... 미지의 여행이 주는 불안보다 내가 모르는 나를 마주치는 것이 더 무섭다. 그러니까 내 귀가 줏대 없이 흔들리는 팔랑귀라는 말인데... 뒤끝 작렬 엄마의 뇌에 ‘팔랑귀’라는 단어가 콕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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