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나도 못 말린다
교통편 예약 전쟁을 치르고 나니, 이번엔 숙소 전쟁이다. 쉬러 가는 여행인데, 여행 준비는 매번 전쟁이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같은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외부의 침입자와 포식자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숙소. 딱 여기서 생각이 멈춰야 하는데, 나의 뇌는 몽상 네트워크를 작동하며 눈동자를 굴린다. 침대도 편하면 좋겠고, 공간도 너무 좁지 않으면 좋겠지. 밤에 불 켜고 일기도 쓸 수 있으면 좋겠고, 뱃속 허전할 때 부엌에서 라면이라도 끓여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지구 상에 그런 숙소는 ‘내 집’ 밖에 없는데, 눈에 불 켜고 이 악물고 주먹 꽉 쥐면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숙소 사진은 물론 후기도 꼼꼼히 찾아 읽고, 위치와 가격, 청결도와 소음 여부, 와이파이와 에어컨, 아침식사와 엘리베이터까지 살폈다.
새벽마다 수업 마치고 들어와서 지도와 전쟁을 벌였다. 머릿속에 입력되는 지명이 워낙 많다 보니, 매번 헷갈렸다. 런던과 파리, 로마 지명들이 한 그릇 비빔밥처럼 뒤섞이고 범벅이 되어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런던의 첫 숙소도 결정을 못했는데 하루하루 시간은 잘도 갔다. 이러다가 머물 방 한 칸 못 구하고, 비행기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나, 마음 완전 비웠어. 역이랑 가깝고, 깔끔하고 비싸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아.”
나름 결단을 내리고 내뱉은 내 말을 딸내미가 무 베듯 단칼에 내려친다.
“엄마! 세상에 그런 숙소가 어딨어?”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은 한 술 더 뜬다.
“어디 이민 가냐? 며칠씩 머무는데, 지붕 있고 벽 둘러쳐 있으면 되지, 뭔 조건이 그리 까다롭냐? 별 차이 없어. 그냥 해. 그냥.”
딸내미와 남편의 합작 공세에 시무룩해지며, 결정 장애 극복을 위한 훈수를 남편에게 청한다.
“그런데 자기는 어떻게 그렇게 결정을 잘해?”
“선택 기준을 정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 그런 다음 자신을 믿어.”
그렇다면, 우리는 여행자니까, 숙소 위치와 가격을 우선순위로 삼고, 나머지는 우리가 잘 헤쳐 나갈 거라 믿으면 된다는 얘기다.
결정을 잘 못한다는 것은 삶의 경험치가 그만큼 없다는 얘기다. 자신의 결정으로 발생하는 상황들에 유연하게 대처할 능력도, 그럴 마음도 부족하다는 얘기다. 그냥 하면 된다. 이것저것 경험해서 경험치를 늘리면 된다. 생각의 안개가 서서히 걷힌다. 내 마음 어딘가에 조금은 남아있을 유연함을 긁고 또 긁어모아, 먼 길 떠날 용기를 부풀려본다.
한인민박과 air b&b, 호텔, 유스호스텔로 35박 숙소를 예약했다. 예약 메일을 주고받고도 하룻밤 사이에 다른 여행자에게 숙소를 강탈당하기도 했다. 뒤늦게 발견한 적나라한 화장실 후기에, 자다 벌떡 일어나 예약 취소 버튼을 누리기도 하고, 숙소 너무 비싸다 엄살 피워 가격을 깎기도 했다. 이제 숙소 예약 경험은 조금 늘었다. 가서 부딪혀 보자. 딸냄! 숙소 전쟁은 끝이다. 짐 싸자!
캐리어 두 개가 굶주린 악어처럼 입을 쫙 벌리고 거실을 점령하고 있다. 여행 가방을 싸 본 경험이 별로 없으니, 가져갈까 말까 손에 집어 드는 것마다 갈등이다. 운동화 탈취제, 1인용 돗자리, 휴대용 물병, 목 베개도 필요하다는 글을 읽고, 집 앞 다이소를 문턱이 닳아지라 뻔질나게 드나들며 물건을 들었다 놨다 했다.
무엇보다 고민 일 순위는 일인용 미니 밥솥이다. 말이 일인용이지 둘이 먹을 밥은 충분히 지을 수 있다. 35박이면 백 번도 넘게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밥 없이 밥 먹을 자신이 없다. 갓 지은 고슬고슬한 흰쌀밥에 양념 깻잎 한 장 얹어 먹으면, 입 안에 퍼지는 밥알과 조림 양념의 조화로움에 행복 지수 상승한다. 바싹거리는 따뜻한 누룽지를 씹어 먹는 즐거움은 당분간 포기하더라도 밥은 먹어야 한다.
그래도 어찌 모양 빠지게 유럽여행에 밥솥을 가져간다는 말인가? 변화를 겪으려고 떠나는 여행인데, 여행 가서도 내 살아온 방식대로 밥솥에 밥을 꼭 지어먹고야 말겠다는 중년의 옹고집이 나도 부끄럽고 싫다.
“엄마! 뭔 밥을 해 먹는다고 그래? 피자, 스파게티, 스테이크. 생각만 해도 좋네. 새로운 음식 먹으러 가는 건데 뭔 밥솥이야?”
비닐로 돌돌 말아진 밥솥을 캐리어에 넣었다 빼었다 하는 엄마를 외계인 보듯 쳐다보며 딸내미가 말했다.
열세 살 딸내미는 모든 것이 새롭고, 오십이 코앞인 나는 모든 것이 낯설다. 이러다 캐리어 지퍼 닫고 여행을 갈 수는 있을지 조바심이 나는 남편이 상황 정리에 나선다.
“그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을 보니, 정말 가져가고 싶은가 보네. 그냥 가져가.”
남편의 응원에 힘입어 마지못해 들고 가는 듯, 앙증맞은 미니 주걱을 꽂은 밥솥을 캐리어 한 구석에 착석시킨다. 그놈의 밥솥이 뭐라고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내 여행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자. 밥솥을 넣든 무쇠 가마솥을 넣든. 지금 가지고 가고 싶으면 가져가고, 여행 다니다 쓸모없으면, 유럽 어느 도시 쓰레기통에 쳐 박아 두고 오면 되잖아. 그래도 지금은 캐리어 한쪽에 앉아있는 밥솥과 낯선 여행길을 함께 떠난다 하니 위안이 된다. 내 마음 나도 못 말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