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런던 이층버스,
너네 너무 멀리 왔다
런던이 마음에 서서히 들어온다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다음날 아침에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꺼내놓은 세면도구와 옷가지를 대강 캐리어에 쑤셔 넣고, 골목을 돌고 돌아 5박을 예약한 한인민박으로 숙소를 옮겼다.
새로운 숙소에도 경기를 일으키듯 울어재끼는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입구부터 불안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햇살 가득한 이층 침대방도, 수건과 김치, 컵라면을 무제한 제공받는 것도, 맛있는 아침식사도, 던져놓은 빨랫감이 뽀송하게 세탁되어 다음날 얌전히 개켜져 방 문 앞에 놓여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침대마다 미니 커튼과 램프가 달려있었다. 딸내미는 쪼르르 이층 침대에 올라가 커튼 팍 치고, 램프 딱 켜고, 자기만의 세상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딸내미는 언제 어디서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춘기 소녀가 분명하다.
새로운 숙소의 침대 위의 램프
교통비를 아껴볼 요량으로 한국에서 딸내미 사진을 찍어 보내고, 10파운드도 미리 결제해서 포토 오이스터 교통카드를 만들었다. 빅토리아 역으로 카드부터 찾으러 가야 한다.
그런데 빅토리아 역에 도착하질 못한다. 지하철 맵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탔는데, 방향이 다른 지하철을 타고 있고, 내리고 보면 출발했던 오발 역에 또 서있다. 런던 빅토리아 역이 해리포터 9와 3/4 정거장도 아닌데, 도착을 못하고 역을 빙빙 돈다. 아무래도 지하철도 없는 도시에 살다 보니 지하철 타는 법도 잊어버렸나, 쓸데없는 자책의 화살을 나에게 쏘아댄다.
빅토리아역에서 힘들게 손에 넣은 포토 오이스터 카드를 딸내미 목에 걸어주었더니, 자기 사진 밉게 나왔다고 뒤집어서 목에 걸고 다닌다. 그런 딸내미를 보니 첫 여행지 런던에서부터 내 속이 다 뒤집어지려 한다. 그래, 너를 벽에 세우고 조명도 없이 대충 사진 찍어 보낸 엄마가 잘못했다!
빅벤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국회의사당을 보고 내셔널 갤러리를 관람하는 것이 첫날 일정이다. 딸내미 핸드폰에 유심칩만 꼽아주면 구글 맵 켜고 잘 찾아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딸내미 핸드폰의 배터리는 죽어가고 있고, 여행 자료는 숙소에 고스란히 두고 나왔다.
유럽여행 시작 두 시간 만에 우리는 모든 연결이 끊기고, 비 오는 런던 거리에서 뾰족 솟아있는 빅벤도 못 찾고 두리번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빅토리아 역에서 두 정거장 거리에, 빅벤과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국회의사당이 모두 있었다. 그런데 낯선 도시에 떨어졌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바로 코앞에 있는 관광지도 찾아가지 못할 만큼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빗줄기는 굵어지고, 얇은 옷만 걸친 몸에는 한기가 들고 떨렸다. 제 갈 길을 서두는 런던 사람들의 우산 속을 헤집고 들어가. 빅벤의 행방을 묻고 내셔널 갤러리 가는 길을 물었다.
“딸내미가 가서 좀 물어봐.”
“싫어.”
“왜?”
“그냥 싫어.”
“......”
남들은 영어 배우러 영국에 유학도 오는 마당에, 영국까지 왔으니 실전 회화를 경험해보면 좋으련만...... 길 물어보는 것은 내 몫이고, 딸내미는 쑥스러움에 열릴 듯 말 듯 입을 오물거리다 끝내 입을 닫는다. ‘다 너 잘 되라고.’하는 막무가내 부모 모드에 불이 켜지고, 난 철없는 부모 짓을 또 한다.
지하철역에서 길을 물어보다, 얼굴에 웃음 가득한 흑인 역무원을 딸내미 영어실습 파트너로 섭외하는 데 성공한다. 흑인의 온갖 부드러운 회유에도 딸내미는 꿋꿋하게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깔아놓은 멍석에, 말 못 하는 아이 취급에, 자존심 상한 딸내미는 더욱 입을 열지 못한다.
여행 와서까지 자신을 불편한 상황에 몰아넣는 엄마라는 사람이 미워, 딸내미는 이제 나에게도 입을 다문다. 딸내미와 마음 거리 좁혀보려고 떠난 여행인데, 엄마라는 사람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딸내미를 채근한다. 우리의 마음 거리는 5센티미터 더 멀어진다.
“We are closed.”
내셔널 갤러리를 겨우 찾아 들어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한 숨 돌리고 있는 우리에게 직원이 말했다. 직원들 파업이다. 내일 가기로 한 대영박물관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꼬인 일정보다 대영박물관 찾아가는 게 더 걱정이다. 버스 정류장에 붙은 노선표를 둘이 열심히 들여다본다. 비 오는 런던 거리에서 버스노선표를 들여다보는 있는 관광객은 우리밖에 없다.
길거리에서 지도를 열심히 보는 딸내미
밖에 내리는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까지 더해져 대영박물관은 바글바글 인파로 넘쳐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과 이집트 문명을 휘리릭 둘러보고, 30분 줄 서서 화장실 다녀오니 더 이상 두 발로 서 있을 기운도 없다.
광장에 퍼질러 앉아 애플주스를 홀짝이며 지친 다리를 쉰다. 빅벤 찾기부터 관람도 못한 내셔널 갤러리를 거쳐, 대영박물관까지 찾아오느라 길거리에서 진을 다 뺐다. 그런 나에게 딸내미는 신이 나서 말했다.
“엄마! 우리 런던에 있는 박물관 시간 되는대로 모두 보러 다니자.”
“뭐? 모두?”
“박물관 구경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엄마도 재밌지?”
“그...... 래.”
박물관 마니아 딸내미의 야심 찬 계획에 다리는 더 후들거리고 기운은 더 빠진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우리 딸내미 보물이다. 틈만 나면 꺼내서 무릎에 끼우고 들여다보는 줄은 알았지만, 1권 ‘올림포스의 신들’에서부터 20권 ‘아이네이아스와 로마’까지 줄줄이 머릿속에 스토리를 꿰고 있는지는 몰랐다.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 이렇게 세계 3대 박물관이 이번 여행 루트에 있으니, 여행 끝나면 내 귀에는 딸내미가 쏟아부은 그리스 로마 신화 20권이 딱딱한 귀지처럼 쌓여있겠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다. 38번 버스를 타고 빅토리아 역으로 간 다음, 지하철을 타고 오발 역에 내리면 된다. 빨간 이층 버스 38번을 발견하고 올라탔다. 관광객 티 팍팍 내며, 이층 맨 앞자리에 앉아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하며 딸내미와 수다를 떤다.
그런데 분명 복잡한 번화가 빅토리아 역으로 가는 길인데,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 뭔가 이상하다. 점차 거리는 한산해지고, 건물은 소박해진다. 불길하다. 불길한 예감은 느끼는 순간 이미 맞다. 불길하다는 느낌은 이미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느끼는 감정이니까.
“이 버스 빅토리아 역에 가지요?"
나는 급한 마음에 딸내미에게 영어회화 연습시킬 생각 같은 것은 예전에 잊어버리고, 한달음에 1층으로 내려가 유리창 칸막이를 두드리며 묻는다.
"No!!! “
큰소리로 구레나룻 시커먼 중년의 버스 운전사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곧 이런 한탄을 덧붙였다.
“You’ve come too far...”
너네 너무 멀리 왔단다. 버스 운전사는 우리가 올라탔던 정류장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으니, 처음 탔던 곳으로 돌아가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38번 버스를 타야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우리가 다시 돌아갈 여정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던지, 옆에 앉아있던 승객과 맞장구까지 쳐가며 ‘아시안 모녀의 빅토리아 역 사건’을 한참 동안 얘기한다. 버스 운전사가 오늘 하루 심심했나 보다. 이게 그렇게 큰 사건인 걸 보면.
'너네 너무 멀리왔다' 버스 이층에서 그나저나 내가 사는 도시에는 지하철이 없으니 지하철에서 헤매는 것을 그렇다 치고, 버스는 뭔가? 빨간 이층 버스 탄다는 즐거움에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확인도 안 하고 버스를 타다니. 한 번도 빼지 않고 가는 곳마다 줄기차게 길을 잃는다.
버스를 갈아타고 50분 전에 봤던 똑같은 건물, 똑같은 가게, 똑같은 나무를 구경하면서 다시 길을 거슬러 올라가자니, 기운이 쏙 빠진다. 그래도 우리도 ‘시간이 금’인 여행자인데...... 숙소는 언제 들어갈 수 있는 거지? 하루가 참 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샌드위치로 때운 점심에 뱃가죽은 등에 붙고,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초밥가게 ‘와사비’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맛있는 초밥과 뜨겁고 매운 컵라면으로 숙소에서 저녁을 먹으며 행복하려는 우리의 계획은 좌초 직전이다.
초밥가게 찾기를 포기하고 버스에 올라타, 딱 한정거장을 지나가는데, 밖을 내다보던 딸내미가 소리쳤다.
“엄마, 와사비다.”
눈 씻고 찾아도 없던 와사비 가게가 환영처럼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엄마, 내릴까?”
“그래, 내려.”
“정말?”
“응, 빨리 내려.”
우린 황급히 벨을 누르고 가까스로 버스에서 내려 와사비 가게 쪽을 향해 뛰었다. 그때 왜 뛰었는지 왜 웃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뛰면서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무슨 일인가 호기심에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가 동시에 터뜨린 그 웃음이 그 순간 우리를 무장해제시켰다. 지도도 없이 물어물어 길을 찾고, 일정이 변경되고, 버스를 잘못 타고......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느꼈던 긴장이 한꺼번에 모두 무너져 내렸다. 내 손에 느껴지는 딸내미의 보드랍고 작은 손의 감촉이, 함께 쏟아낸 커다란 웃음소리가, 오랜만에 힘차게 뛰는 심장박동이, 바로 그 순간이 선물이었다.
당신이 무엇을 수확했는가에 따라 하루하루를 판가름하지 말라. 당신이 어떤 씨앗을 심었는가에 따라 하루하루를 평가하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오늘 런던 여행을 하며 내 마음 밭에도 소중한 씨앗을 하나 심었다. 엄마로서의 책임감, 자식으로서의 의무보다, 힘든 인생길에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한 명의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한 명의 호모 사피엔스와의 관계의 씨앗.
숙소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쓰레기 더미에 코를 킁킁거리고 있는 작은 여우를 봤다. 처음에는 떠돌이 개라고 생각했다. 귀가 쫑긋하고, 입 주위는 하얗고, 불그스름한 털이 등을 타고 내려오는 모양새가 분명 여우다. 주택가를 배회하는 여우가 런던 시민들에게는 골칫거리라던데, 여행 중인 우리에게는 비 오는 길거리를 배회하는 그 여우가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의 여우라도 되는 냥 신기하고 새롭다.
숙소에 돌아와 부드러운 연어초밥에, 매콤하고 뜨거운 컵라면 국물을 마시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길을 잃고 헤매도 구경도 잘하고, 버스를 50분이나 잘못 타도 숙소에 제대로 돌아오고, 딸내미와 얼굴 맞대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니, 그럼 됐다.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맸는데도 런던이 마음에 서서히 들어온다. 좋아하게 될 조짐이 보인다.
와사비 초밥과 매콤한 라면으로 먹는 저녁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