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지하철에서
내 귀에 조용히 속삭인 말

큰 글씨말고 작은 글씨 기차를 타라니

by 글쓰는공여사

다음날에도 비가 내리고 간간히 햇살이 들어왔다 나갔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오늘은 내셔널 갤러리와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서둘러 나온 탓에 내셔널 갤러리 입장 시간이 되기도 전에 트라팔가 광장에 도착했다. 하늘로 쭉 뻗은 해군 제독 넬슨의 기념비와 4마리의 사자상, 푸른 닭 조각상이 늠름하게 비 오는 광장을 지키고 있다.


아무리 멋진 조각상이라 해도 사람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없다. 비 오는 날 분수를 청소하는 아저씨. 분수 바닥의 이끼를 닦는지, 바닥의 동전을 건져 올리는지 기다란 청소도구로 분수 물을 열심히 휘저으며 청소를 한다. 그 모습을 유럽여행 온 우리는 귀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흥미롭게 들여다본다.


내셔널 갤러리


멀리 빅벤이 보이고, 비가 와서 더욱 선명해진 빨간색 이층 버스가 비에 젖은 회색빛 건물들을 배경으로 지나간다. 축축해진 런던 거리가 한 장의 엽서처럼 눈에 담긴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조셉 라이트 오브 더비의 ‘공기 펌프 속의 새 실험’ 그림을 만났다. 한 장면으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공포에 질려 퍼덕거리는 비둘기와 구경꾼들 각각의 얼굴에 드러난 의기양양함과 두려움이 촛불, 달빛, 램프의 빛과 그림자로 디테일하게 표현되어있다.

공기 펌프 속의 새 실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짓궂은 친구들이, 아무리 천하의 헤밍웨이라 할지라도 여섯 단어로 소설을 완성할 수는 없을 거라며 내기를 걸었다. 헤밍웨이는 그 자리에서 여섯 단어로 초단편 소설을 완성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n.

팝니다. 한 번도 신은 적 없는 아기 신발.


여섯 단어만으로 소설을 완성한 헤밍웨이, 한 장면의 그림으로 이야기의 전후를 상상하게 하는 조셉 라이트 오브 더비의 그림. 어쩌면 인생을 표현하는 데도 그렇게 많은 글이나 말, 그림도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일정은 해리포터 광팬 딸내미가 런던에 온 첫 번째 이유,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가는 것이다. 거기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딸내미의 입이 웃고 눈이 웃고, 얼굴도 몸짓도 모두 웃는다. 해리포터 스튜디오가 딸내미에게 그렇게 큰 의미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나는 딸내미의 지나친 흥분상태를 낯설게 바라본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하고 왔지만, 30분 이상 늦으면 아예 입장 불가라 한다. 제 때 입장 못하고, 딸내미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는 날에는, 엄마와의 마음 거리 이번엔 5센티미터가 아니라 5미터는 멀어지고 말 거다. 늦을까 불안한 마음에 입장 시간보다 무려 3시간 앞서 출발한다. 아무리 길치라도 3시간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유스턴 역에서 기차를 타고, 와포드 정션 역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유스턴 역까지는 잘 찾아왔는데, 이번에는 내야 할 요금이 문제다. 해리포터 스튜디오는 런던에서 조금 벗어난 9 존 외곽에 있어, 가지고 있는 교통카드에 돈을 더 채워 넣는 탑업을 해야 한다.

해리포터 스튜디오 가는 셔틀버스


얼마를 더 채워 넣어야 하는지 창구직원에게 물어보니, 탑업 머신에서 하라 한다. 탑업 머신은 우리에게 각각 15파운드를 채워 넣으라 미친 소리를 한다. 한 명당 2만 원이 넘는 팝업을 하라니, 그렇게 비쌀 리가 없다. 얼마를 지불하든 빨리 가고만 싶은 딸내미의 마음은 급하다. 그래도 엄마의 호들갑에 마지못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인터넷 정보를 검색한다. 원하는 정보를 찾지도 못하고, 출발할 때 채워둔 3시간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빠르게 떨어진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창구직원을 들볶는다. 우리가 창구 앞을 계속 서성이는 것을 봤던지 다행히 친절을 베푼다. 교통카드를 기계에 인식시키고, 각각 5파운드를 탑업 하라 결론을 내려준다. 휴! 20파운드 손해 보지 않으려다 심장은 쪼그라든다. 시간과 가치는 던져두고, 절대적인 비교로 경제적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항상 문제다. 서둘러 기차를 타야 한다. 딸내미 눈빛에 초조함이 읽힌다.


기차역으로 들어서니 이번엔 어떤 기차를 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여행은 매번 새롭고 낯선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결정을 내리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그런데 내가 기껏 검색해 온 정보라는 것이 지금 들여다보니 한심하다. 이걸 정보라고 검색하고, 수첩에 베껴오다니......


‘큰 글씨 말고 작은 글씨를 타세요.큰 글씨는 50분, 작은 글씨는 20분 걸려요.’


큰 글씨, 작은 글씨라니...... 모를 때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 이번 여행에 내가 준비한 초강력 무식한 무기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역무원을 붙들고 속사포 영어를 쏟아낸다.


“해리포터 스튜디오...... 가장 빠른 기차...... 어디?”

역무원이 가리키는 기차를,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건네고 무조건 뛰어가 올라탄다. 이리저리 날뛰는 엄마 쫓아다니느라 딸내미도 힘들었는지 얼굴이 벌겋고 긴장이 잔뜩 묻어난다.


한 숨 돌리고 나니, 어느덧 와포드 정션 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내리면 된다. 문이 열리면 총알처럼 튀어나가려고 우리는 기차 문 앞에 코를 박고 서있었다.


기차가 덜컹 소리를 내며 멈췄다. 문아~열려라. 똑딱 1초, 똑딱 2초, 똑딱 3초. 그런데 무슨 일인지 문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문에서 쏟아져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은 벌써 우리 문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아주 짧은 침묵을 함께 나누며 서있다. 그러다 그들 중 누군가 침묵을 깨고, 내 왼쪽 귀 가까이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Push the button. Please.”


버튼을 누르라고? 세상에,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리는 수동식 기차라니? 문을 가로막고 서있던 나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여전히 문이 안 열린다. 내 뒤의 사람들은 또 기다린다. 문이 열리기를. 똑딱 1초, 똑딱 2초. 짧은 침묵 속에 누군가가 두 번째로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Push again. Please.”


오...... 민망함과 미안함에 온 힘을 손가락에 실어 버튼을 눌렀다. 문이 또르르 열렸다. 내 등 뒤에 갇혀있던 많은 사람들을 열차가 훅하고 문 밖으로 토해냈다. ‘런던 기차는 버튼을 세게 눌러야 문이 열린다.’ 그걸 모르고 문을 가로막고 서있던 내 덕분에, 왜 저 여자는 버튼을, 세게, 안 누를까 눈알만 데구루루 여러 명 굴리고 서있었다.


우리나라였다면, 내가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있을 때, 벌써 수십 개의 손이 날아와 버튼을 대신 누르고, 폭발 직전 열차를 탈출하듯 뛰쳐나갔겠지. 두 번째 내가 버튼을 누를 기회는 상상 속에도 없다.


기차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는 것을 모르는 여행자가 버튼을 누를 때까지 기다려주는 런던 사람들의 여유가 부럽다. 그 행동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려는 지나친 배려였거나, 다른 사람들과 엮이지 않으려는 지독한 개인주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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