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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플랑 Jan 13. 2019

재퇴회면식휴

가끔(대체로 방을 청소하다가) 옛날 일기장이나 수첩을 열어 보게 된다. 그럴 때면 어릴 적의 내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생각의 깊이가 그윽하고 쓰는 어휘가 기발하다. 예전의 나는 무수한 글을 읽었고 수다한 사람들을 만났으며 다양한 노래들을 만들어 불렀구나. 이국의 언어를 쉽게 배워 말했고, 세상에 없는 새로운 지도들을 그려냈으며 심지어 내가 만든 새로운 언어 체계도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이전에 알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린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다. 간단한 상식도 알지 못하고 특히 인문학에는 완전히 문외한이 되어버렸다.


일전에는 ‘내과 醫局(의국)’이라고 쓰인 서류봉투를 ‘내과 배상(拜上)’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주는 이와 받는 이를 바꿔버린 셈이다. 김정은과 김정일을 혼동하여 망신을 당한 일도 있다. 처방창에 ‘지적장애’를 영어로 써야 하는데 intellectual disabilities의 철자를 알지 못하여 interlectual, intelectual, inturlectual…. 한참 진단명 창에 세상 모든 인터렉츄얼 들을 입력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보다 못한 교수님께서 대신 진단명을 입력한 일도 있다. 그때 교수님의 표정은 ‘우리 의국에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가 입국하였군.’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무식해진 덕에 상대적으로 한자어를 접할 일이 많은 남편에게 종종 놀림을 당하곤 했다. 함께 서점에 가면 남편은 꼭 “이 책 제목이 뭐게?”하면서 한자어로 제목이 쓰여진 책을 들고 오는데, 한번은 다섯 자로 된 책이길래 “세기의 금서!”라고 했다가 교보문고 강남점 한복판에서 신랑이 바닥에 주저앉아 박장대소를 하게 만들었다. “네 이름에 세상 세(世)자가 들어가잖아. 너 한자로 네 이름은 쓸 줄 알잖아! 그런데 이 책 제목이 어떻게 세기의 금서겠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책 제목은 ‘영웅의 도시’였다. 영웅의 도시는 옘병, 그 도시 영웅들은 얼마나 한자어를 잘 알길래 표지에 한자어로만 제목을 해놓는단 말인가. 하늘천 따지같은 놈들.


오늘은 비디오투시연하장애검사를 하고 판독지를 입력하러 외래로 뛰다시피 가다가 어떤 문 앞에 “회면식휴”이라는 문구가 써 있는 것을 보았다. 회면식휴. 무슨 뜻일까? 또 어떤 사자성어겠지. 나는 무식하니까, 무식해졌으니까.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4시까지 환자들 식이를 정해 주어야 영양팀에서 제 시간에 저녁을 만들 수 있다. 바쁘게 판독지를 입력해 넣고 임상강사 선생님과 컨설트가 난 환자의 상태에 대해 불꽃튀는 설전을 벌였다. (“선생님이 적은 기록 다 지우고 제가 새로 적어두었으니 이렇게 처방해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선생님!”)


생각해보니 점심을 먹지 못했다. 연하장애 검사를 하고 남은 바나나를 하나 까서 먹으며 컨설트 답변을 입력하다가 예의 그 회면식휴에 대해 생각한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라는 말일까? 그런 말을 문 앞에 붙여놓을 수 있는 사람은 어쩐지 직장에서도 조금 덜 불행할 것 같다.   

윗년차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하고 난 뒤의 저녁시간에는 혼자 의국에서 일을 한다. 대체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잠을 자러 숙소로 뛰어가지만, 오늘은 친한 친구가 던진 화두에 마음이 어지럽다. “요즘 글을 쓰고 있어.” 머리에서 뭔가 쾅 하고 울린 것 같다.

언제부터 글을 쓰지 않게 되었을까?

나는 나의 ‘회면식휴’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 걸까?

울적한 마음에 스무 살부터 알고 지낸 ‘의형제’들에게 도움을 구한다.


“오늘 글을 한 편 써야겠는데 어떤 주제가 좋겠니?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써 볼까?”

“‘왜 우울한 감정과 별개로 위는 꼬르륵거릴까?’ 에 대해 써보는 건 어때?”

뜬금없는 대답에 웃음이 터진다. 이어 부엉이가 탕수육에 소스를 붓느냐 안 붓느냐 하는 얘기로 ‘부엉’, ‘안 부엉’하면서 둘이서 자그락자그락한다. 다행히 바보가 된 건 나 혼자만이 아닌 것 같다. 빈 문서를 열고 ‘존재의 의미’에 대해 써 보기로 한다.

‘존재의 의미란 무엇일까.’

3분 정도 고민을 한다. 속으로는 ‘옘병 이것도 다섯 글자야. 세기의 금서라고 오해하기 딱 좋겠어.’. ‘탄산수 한캔 마시고 시작할까’. ‘그러고 보니까 진단서를 안 써놨다. 망했네.’같은 생각들이 든다.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한다. 외래에 의국 캠코더를 두고 그냥 올라온 것이 기억이 났다.

 존재의 의미고 뭐고 누가 훔쳐 가면 1년치 치료실 컨퍼런스 영상을 날릴 판이다. ‘빈문서1’창을 닫는다. ‘빈문서1을 저장할까요?’하는 팝업이 뜬다. ‘저장 안 함(N)’버튼을 누르는데 묘한 쾌감이 든다. 오늘 처음 내 마음대로 뭔가 해본 것 같다. ‘빈문서1! 너를 파괴해주겠어!’같은 느낌이다.

주섬주섬 가운을 꿰어 입고 외래가 있는 2층으로 내려간다. 생각해보니 외래로는 예의 그 ‘회면식휴’방을 지나는 길로 돌아 갈 수 있다. 일부러 우회해서 ‘회면식휴’방으로 간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라는 말을 직장에 걸어 두는 사람의 방을 한번 더 보고 싶어서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 방에 써있는 문구는 네 글자가 아니었다. 뛰어서 가겠다고 일부만 읽은 모양이다. 그 방 문에는 움직일 수 있게 만든 작은 화살표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써 있었다.


재퇴회면식휴

실근의담사가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캠코더를 찾으러 외래로 간다. 으흐흐흐, 바보같은 웃음이 난다. 나는 하루종일 무엇에 대해 고민했단 말인가.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린다. 의형제로부터의 전언이다. “법륜스님이 인생은 원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랬어. 다람쥐가 도토리를 찾아 먹는데 무슨 자기 삶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듯이, 그냥 살래.”

우울하지도 않은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의국 간식창고에서 나쵸 칩을 꺼내 와그작 소리를 내며 먹고 싶다. “재실퇴근회의,면담식사휴가”를 염불처럼 외며 의국으로 향한다. 마지막 문장은 다시 써야지. 醫局으로 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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