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백혈병 소아암 협회에 기증하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잘랐다. 30 cm 조금 안되는 길이고, 년수로는 2년 조금 넘게 기른 머리카락이다.
의대에 입학하고서 꽤 많이 들었던 말은 "감정이입이 심해서 힘들겠구나."였다. 물론 힘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잘 해 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아픈 것을 보는 건 (비단 감정이입능력 최고점인 나뿐만이 아니라)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힘든 일일 것이다. 게다가 우리대학병원은 혈액내과가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그 명성에 걸맞게 소아암, 그 중에서도 소아 혈액암 환자가 정말 많다. 실습학생으로 회진을 따라다니면서 울컥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주로 교수님께서 환자의 보호자에게 기대여명이나 5년 생존률 같은 것에 대해 설명할 때였다. 이 얘기는 이쯤에서 중략하기로 하자.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소아암 환자에게 모발 기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당장 미용실에 가서 "제 머리카락을 모두 바짝 잘라 주세요! 저는 의사가 될 사람이니 아픈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어요!"라고, 외칠 수 있는 큰 그릇의 사람이었으, 면 참 좋았으련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은 기장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대학 합격소식을 들은 직후로 쭉 긴 머리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었다. '어떤 헤어 시술도 받지 않을 것'도 생각보다는 쉬웠다. '생각보다는'정도의 문구로 갈등과 빡침과 절약한 돈은 모두 술값으로 쓴것과 ....등등은 넘어가기로 하자.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긴 머리의 나'와의 작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늘 머리를 길러 왔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내 모습이 늘 마음에 들었다.
마음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사실 여러 번 있었다. 죽음과 가까워 질수록 삶이 아름다워 보이더라, 정도로 설명이 될까? 어쩌면 우리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결국 중요한 건 껍데기가 아니더라 라는-정말 진부하고 상투적인 말로, 설명이 될까?
이제 나는 샤를인지 셰리인지 하는 디자이너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이 머리를 오래 길러 왔는지, 아픈 아이들에게 머리카락을 기증하고는 싶은데 짧은 머리가 되는 건 견딜 수 없고, 그 이유가 뭔지, 짧은 머리의 내가 얼마나 못생겼을지에 대해 아주 오랜시간 주절거렸다. 한참을 주절거린 다음에야 '그러니까,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잘라 주세요.'했다. 샤를인지 셰리인지 하는 디자이너는 침착하게 모든 말을 다 들어 주었다. 그러더니 노란 고무줄을 가지고 와서는, 내 머리를 질끈 묶었다. 그리고는,
싹둑
30초도 걸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잠시, 서걱 하는 가위의 느낌이 날때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내 머리에 뭐하는 거죠? 오두가단 차발불가단!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외칠 뻔 했단 말이다. 그리고 또 잠시, 이 30 cm의 머리카락과 함께 보냈던 울분과 행복과 기쁨과 억울함과 슬픔이 가득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또, 아주 아픈, 그래서 머리카락이 다 빠진 어린 아이가 내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을 쓰고 울분과 행복과 기쁨과 억울함과 슬픔이 가득한 삶을 오래, 의대생의 의료지식보다는 훨씬 오래, 의료진의 생각보다는 훨씬 훨씬 더 오래, 한참 오래 사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것은 괜찮아졌다. 그리고 거울을 보았다.
어 뭐야,
예쁘잖아.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짧은 머리의 나를 가장 열심히 조롱했던 건 바로 나였구나. 웃음이 났다. 마구 웃었다. 샤를인지 셰리인지 하는 디자이너도 같이 웃어 주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페이지를 볼 수 있는 여러분들은 짧은 머리를 한 나를 놀리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이제 나조차도 나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짧은 머리에다 민낯을 한 거울 속의 내가 너무 예쁘고 멋있어서 기절할 지경이다. 아침마다 나 자신에게 심쿵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심장에 해로울 것 같아 걱정이 될 지경이다.
* 모발기증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http://www.soaam.or.kr/donation/hair.php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대략 25 cm 이상의 염색, 파마등 일체의 시술을 하지 않은 머리카락이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통과해서 협회에 보내도 모발 상태에 따라 쓰여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하네요.
그렇지만 그건 그 후의 일이고 기증 자체로 충분히 벅차오르고 행복해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