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인 '글15편'을 채우고는 한참을 또 쉬었다. 병원을 다니고 진료를 하고 논문을 쓰고 책을 읽었다. 주말에는 낮잠을 자고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몰아서 보았다. 갑자기 휴가를 받아 방콕에 다녀왔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화요일에 항공권을 끊어서 토요일에 출국을 했다. 갑자기 이사를 했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매일이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었다. 글을 쓰지 않아도 견딜만한 날들이었다.
딱 한달 전 근전도 검사를 했던 환자가 있었다.
위약감이 갑자기 진행되었다고 했다. 내 또래였다. 환자는 유쾌했다. 내게 몇 가지 농담을 던졌고 나는 재밌어서 깔깔 웃었다. 검사가 끝나고 병실로 돌아가면서 그는 종종 자신을 보러 오라고 했다. 오늘처럼 웃겨주겠다면서.
환자를 보내고 검사 결과를 정리해 보니 몇 가지 무서운 진단명이 떠올랐다. 교수님과 내 소견을 정리해서 주치의에게 보냈다. 주치과에서 이런저런 치료를 했고 의사 십 수 명이 달라붙어 의견을 내고 약을 투약하고 검사를 하고 운동을 시키고 희망을 가졌고 절망했고 다시 약을 바꿔 투약했다. 하지만 그의 증상은 좋아지지 않았다.
지난 주에는 복도에서 우연히 그 환자의 아버지를 만났다. 애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지금은 고개도 혼자 못 든다, 치료방법이 있겠느냐, 왜 보러 오지 않느냐..... 고 했다. 영상 검사 결과를 아직 확인 못해서, 다음에 갈게요,했다. 주치의도 아니고 두시간 남짓 검사를 했을 뿐인데 다시 가서 인사를 해도 되나? 싶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두려움이 일렁거렸다. 고개도 못 가눈다고? 증상이 이렇게 빨리 진행한다고? 몇 가지 아주 무서운 병명이 떠올랐다. 그 환자의 차트에 '감별진단'으로 써 있었던 진단명들, 결과지에 적어서 보냈던 그 병들.
주말에는 집에 와서 몇 가지 논문들을 찾아 읽었다. 감별진단이 될 만한 진단 중에 놓친 것은 없는지. 처치는 적당했는지. 모든 치료가 적시에 적절하게 시행되었다. 이제 기다리는 수밖에. 월요일에 출근하면 가서 인사라도 해야겠다. 약을 잘 썼으니 기다려보자고, 해야겠다. 웃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리고 오늘 출근해서 그의 병실을 찾았다.
해당과 환자 목록에 그의 이름이 없었다.
불길함과 불안이 순식간에 턱 끝까지 차올랐다.
환자 검색창에 환자 번호를 입력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열람사유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떴다. '검사결과 확인'을 선택했다. 그리고 보았다.
사망기록을.
토요일 아침 7시 23분 그는 사망했다.
오전 11시에 검사를 예약한 환자는 11시 40분에 검사실에 도착했다. 내 어머니 또래의 여자환자였다. 한 시간 반 남짓한 검사 시간이 지나면 나는 식사를 못 하고 오후 외래 진료를 해야 했다. 환자는 낯선 도시 이름을 말하며 멀리서 오느라 늦었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했다. 괜찮으니 누우시라고 하고 손톱 밑에 흙때가 낀 손을 알콜솜으로 닦으며 검사를 시작했다. 그러자 또 죄송하다고, 어제 나무에 물을 주느라 그랬다고 했다. 이 겨울에 무슨 나무요? 부루베리. 겨울이라 가물어서..... 흙을 막 이렇게 뒤집어 주매 물을 줘야 혀서... 근디, 이렇게 물만 잘 주믄, 부루베리가 겨울을 신통하게 잘 나. 아이고 슨상님 근디 죄송해서 어떡햐. 나땀시 점심식사 못하는거 아니여?
어머니 환자의 말에 적당히 대답을 해 드리면서 검사를 했다.
검사를 하면서 그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결국 진단이 뭐였을까, A였을까?B였을까?
직접사인은 C였겠지.
이제와서 진단을 감별한들 무슨 소용이람.
그래, 이제 와서.
역시 지난주에 가서 인사라도 할 걸 그랬지.
아니야. 더 이상 감정이입을 하면 안 돼.
지금보다 훨씬 더 비통했을 거야.
그래. 잘 한거야. 검사 결과도 다 설명해 주었잖아.
나는 할 만큼 했어
그러니까 이제 잊어버려
그래
잊어버리자
12시 반이 지나자 어머니 환자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아이고 슨상님 끼니를 거르겠네, 아이고 나땜시, 근디 나가 네시간 전에 나온다고 나온건디.....아이고 굶으면 큰일인디.
됐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도 모르게 사나운 말을 툭 뱉었다. 겨울 흙보다도 차가운 내 말투에 어제 하루종일 흙을 맨손으로 뒤집어 가며 부루베리에 물을 주고 온 어머니가 조용해졌다.
검사는 한시께에 끝났다.
한시반 진료까지는 삼십분이 남아서 충분히 밥을 먹고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식욕이 없었다. 밥 대신 엎드려서 좀 자기로 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구르는 소리와
그러니까 이제 잊어버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왜 보러 오지 않았어요
그런 것들이 계속 허공을 떠돌았다
그리고 잠시 뒤 어머니 환자가 검사실 문을 빼꼼 열고 비닐 봉지를 던지듯이 내게 안겼다.
끼니 굶으면 안되여
그녀가 도망치듯 검사실을 나가고 나서 비닐 봉지를 열어 보니.....봉지 안에는 요거트가 들어있었다.
블루베리맛이었다.
비로소 눈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끔찍한 사람이 되고 있다.
이렇게 오늘도 끔찍해져가고있다.
잊어버리라니,
무엇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