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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플랑 Oct 24. 2021

어둠의 마법 방어법

어쩌라고!

 해리 포터의 오랜 팬이다. 마법 학교인 호그와트에서는 마법사가 될 자질을 갖춘 머글(마법사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호그와트 입학 증서를 올빼미를 통해 전달해 준다. 내게도 언젠가 올빼미가 날아와 호그와트 입학 증서를 줄 거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 인생의 절반을 올빼미를 기다리며 살고 있는 셈이다. 호그와트 개강은 9월이지만 한국 학제에 맞게 3월에 입학식을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 2월에도, 8월에도 방심하지 못하고 창문 근처를 기웃거린다. 올빼미가 한국의 고층 건물에 익숙하지 않아 창문에 머리라도 부딪히면 큰일이니까. 언젠가 친구 한 명이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엔 나이가 좀 많지 않아?’하고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바보, 호그와트는 윤년을 따진다고. 마법 학교 나이로는 이제 겨우 7살인걸. 머글들은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하면서 초조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서 아이 크림을 팔자 주름과 눈주름에 애달프게 처덕처덕 바르는 것이다.)


 언젠가 인턴 휴게실에서 호그와트의 입학 허가서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 했더니 한 친구가 조심스레 다가와 ‘나도’라고 말했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머글들 사이에 섞인 마법사들은 금방 친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종종 마법을 쓰러 다니고 싶은 상황에 처했는데, 예를 들면 못살게 구는 다른 의사에게 저주 마법을 걸고 싶다거나, 시간을 빨리 가게 해서 인턴 생활을 얼른 끝내고 싶다거나 할 때가 그런 때였다. 마법 학교 밖에서는 마법을 사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대신에 우리 둘은 오프 날짜를 맞춰 술을 자주 마시러 다녔고, 어느 날 친구가 내게 기억 상실 마법을 거는 바람에 필름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아니면 소주 두 병을 혼자 마셔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기억 상실 마법 쪽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다음날 친구가 내게 ‘속은 괜찮아?’하고 하도 여러 번 묻길래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내가 어제 무슨 실수라도 했니?’하고 되물었더니 충격적인 답이 돌아왔다. 술을 한참 신나게 마시더니 갑자기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운 것만 해도 최악의 실수인데 심지어는 우는 이유를 묻자 ‘나는 용기가 없어서 그리핀도르 기숙사에 배정되지 못할 거야. 후플푸프에 배정될거야. 왜 나는 용기가 없을까!’ 뭐 그런 말을 하면서 울었다는 것이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시 그런 창피함을 느낄 수 있을까 싶게 창피했다. 그 충격 때문에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다른 의사에게 저주 마법을 걸고 싶은 상황이 생겨 그 친구와 또 술을 마시러 나갔다….

 (혹시 이 글을 보는 후플푸프 학생이 있다면 나쁜 감정은 없으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아무튼간에 언젠가는 ‘어둠의 마법’을 쓰는 나쁜 마법사들에 대항해서 용기와 우정과 사랑, 뭐 그런 소중한 것들을 지키며 살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입학 증서가 도착하지 않아서 의사 일만 하고 있다.


 어느 날 정말 유난히 못된 사람이었던 레지던트 한 명이 나를 수술방 복도 한 복판에 세워 놓고 “너 마음에 안 들어! 너 마음에 안 든다고!” 하고 소리를 질렀더랬다. 아직도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데, 누군가가 내게 품은 적의를 그렇게 순수하게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을 처음 겪었기 때문이다. 그 날 내가 했던 실수는 그녀의 사번으로 수술방 컴퓨터에 로그인을 해서 수술 환자의 영상을 미리 바탕화면에 띄워 놓지 않았던 것이었다. 곧 하려고 했는데, 정말 이제 곧 하려고 했는데 영상을 띄우기 전에 그녀가 먼저 수술방에 온 것이다. 방 안에서 혼냈어도 될 일인데 왜 손목을 잡아채서 복도로 데리고 나가 소리를 질렀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무튼 덕분에 그 장면을 마법사 친구가 본 모양이었다. 마법사 친구만 본 것은 아니고 그날 수술방에 있던 사람들이 다 봐서 인턴 숙소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며칠 뒤에는 처음 보는 마취과 교수님께서 “인턴생활 녹록치 않죠. 힘내요” 하면서 어깨도 두드려 주고 갔다. 


 그 날 마법사 친구가 내 방에 찾아와서 이불을 덮어 쓰고 울고 있는 나를 다독이며 엄청난 비밀을 알려 주었다. 오늘 내가 당한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어둠의 마법’인데, 자신은 그 마법을 방어하는 주문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는 중에도 궁금해서 이불 밖으로 나와 ‘뭔데?’하고 물었다. 


 주문인즉슨 ‘어쩌라고’라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우듯이 ‘어쩌라고!’하고 크게 외쳐 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다시 이불 안에 들어가서 꺼이꺼이 울었다. 인턴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어디 시골에 가서 살고 싶었다. 사실 그날 내가 운 건 모욕을 당해서도 아니고, 인턴 점수를 잘 안 줄까봐 걱정이 되어서도 아니고, 내일 출근하면 그녀의 얼굴을 또 봐야 해서였다. 무서웠다. 만나기 싫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며칠 뒤, 어쩐 일인지 화가 난 채로 의국에 들어 온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의국 정수기 물통을 왜 갈아두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녀가 의국에 오기 5분 전에 의국에 들어와서 그녀가 케익이며 만두며 이것저것을 덜어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 하고 있던 나는 정수기 물통이 비었는지도 몰랐다. 설거지도 인턴 업무, 인턴 숙소에서 우유를 가져다가 의국 냉장고에 채워두는 것도 인턴 업무, 얼음을 얼려 두는 것도 인턴 업무, 정수기 물통을 바꾸는 것도 인턴 업무인데 그냥 그 날은 설거지부터 시작했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계속 소리를 질렀고 이내 나는 심장이 엄청나게 두근거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두려웠다. 곧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지난 달 인턴 친구가 그녀에게 혼나다가 눈물을 보였더니 한시간동안 왜 우냐고 소리를 질렀다는 말이 생각났다. 가까스로 울음을 삼켰다.


 그때 마법사 친구가 생각이 났다. 손에는 아직 세제가 묻어 미끌거리고 오늘 치 우유를 냉장고에 안 채워 놨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지만 그런 것은 차지하고, 일단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지팡이를 겨누는 상상도 하면서. ‘어쩌라고! 어쩌라고!’


 그러자 정말로 마법처럼,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어쩌라고, 정말. 정작 나는 이 의국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데, 정수기 물통이 비었다고 저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인격적으로 미성숙하네. 자기가 먹은 그릇은 스스로 치우는 것이 어른 된 자의 기본인데 매번 의국에만 오면 더러운 그릇들과 반쯤 먹다 남은 우유곽이 돌아다니니 나더러 진짜 어쩌라고. 정수기 물통이야 지금 바꾸면 될 일인데 뭘 저렇게 화를 내고 난리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고개를 들고 나도 한 마디 받아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물통 지금 바꾸겠습니다.”

 그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잽싸게 정수기 물통을 바꿨다. 물통은 무겁지만 무릎 위에 한번 올렸다가 얹으면 금방 정수기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 그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바꿨습니다, 선생님. 물 드실 수 있게 컵도 지금 바로 설거지 하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어둠의 마법 방어법 주문의 신봉자가 되었다. 가끔 내면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려올 때에도 이 주문은 요긴하다. 주문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지금에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말 강력한 어둠의 마법을 만나게 되면 요긴하게 쓰일 주문이니 연습을 해 두도록 하자.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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