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검사가 끝나고 나면 검사실에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되냐고 묻는 어르신들이 있다. 복도는 춥고, 다음 검사나 진료까지 시간이 남으니 따뜻한 검사실에 조금 더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다음 순서로 검사할 환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면 흔쾌히 그렇게 하시라고 답한다. 나야 어차피 컴퓨터로 검사 결과지 작성이나 컨설트(consult,협진)에 대한 답변 입력만 하면 되고, 검사실에는 침대가 있어서 환자분들이 쉬었다 가시기에 좋기 때문이다.
하루는, ‘네, 편하게 계세요.’ 했더니 컴퓨터를 쓰고 있는 내 뒤에 앉아 있던 어머님 환자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매주 한 번은 듣지만, 차마 검사실에서 지금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소리. 그랬다. 우리 어머님은, 거기서 발톱을 깎고 계셨다. 잠시 동안 고민했다. ‘편하게 계시라고 했으니, 발톱을 깎으셔도 되는 건가? ’편하게‘의 정의가 어디까지인가?’ 그렇게 잠깐 망설이다가 ‘뒤에 검사할 환자분들도 있으니 발톱은 여기서 깎으시면 안 된다’고 정중히 말씀드리니 첫차를 타고 급하게 오느라 발톱 깎을 시간이 없었는데 야박하게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야박이라니…. 순식간에 야박한 사람이 되었다.
또 다른 하루는, 검사가 끝난 뒤 아버님 환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계시고 나는 돌아앉아 결과지를 부지런히 입력하고 있었는데, 아버님의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데 도통 받지를 않으시는 거였다. 한참 참다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버님은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을 타고 계셨다. 그랬다. 우리 아버님은, 거기서 트로트 음악을 듣고 계셨다. 벨 소리가 아니라 음악 재생을 해 두신 거였다. 잠시 망설였다. 편하게 계시라고 했으니 음악 감상 정도는 괜찮은 것 아닌가? 그러나 밖에 앉아 있는 환자분들이 검사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와 환자가 춤이라도 추는 줄 알면 곤란하지 않은가. 하여 검사실 밖 복도와 대기실에 환자분들이 계시니 음악은 꺼 달라고 최대한 정중히 부탁드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야박하다고 혼내지 않으셨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그 4분의 4박자의 경쾌한 리듬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쿵짝쿵짝, 둠칫둠칫, 아아 처음 느껴보는 이 흥겨움. 애절하지만 비통하지 않은 가사, 왠지 다 똑같은 것처럼 들리는 가락 위에 얹어지는 구성진 목소리, 뭐지? 삑사린가? 싶다가도 구렁이 담 넘듯 그루브로 승화되는 음정 이탈….
몸살이 나서 컨디션이 좋지 않던 어느 날, 출근을 하려고 샤워를 하던 중에 돌연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으흐흐흑 나도 아파 죽겠는데 내가 누굴 치료를 한다고.’ 뭐 그런 서러움 이었던 것 같다. 한번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니까 서러움의 바다에 휩쓸려가 버려서 계속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다 씻고 당직실로 돌아와 해열진통제를 먹으면서 또 울었다. 서러움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이었다.
겨우 옷을 꿰어 입고 당직실에서 병원까지 가는 5분 남짓 되는 복도를 터덜거리며 걷는데, 이어폰에서 엄청나게 흥겨운 가락이 들린다. 어제 듣다가 만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앨범 중 아무 곡이나 랜덤 재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제목이 ‘천하장사’라는 곡이다.
씨름판이 열린다 징소리가 울린다
동서남북 방방곡곡 팔도장사 다 모인다
(중략)
뚱보장사 나오신다 키다리장사 나오신다
거머쥐고 얼싸안고 씨근 벌떡 일어섰다
근육통과 두통 때문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나는 복도에 서서 푸하하,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그래 내가 이 구역 천하장사다. 뚱보 장사도 키다리 장사도 다 이길 수 있다. 해열제 덕인지 열도 내렸다. 트로트와 해열제 덕에 무사히 그 날의 한 몫을 해 낼 수 있었다.
그 후로 일을 할 때는 이어폰으로 트로트 메들리를 듣고 있다. 트로트를 말할 때는 트로트 말고 뽕짝, 아니 ‘뽀옹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음악의 본질을 좀 더 살려 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강산에다 변치 않을 사랑을 맹세하는 노래도, 이미 떠난 내 님을 그리워하며 항구에 서서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도 모두 좋다. 그러나 역시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천하장사’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사나이 승부의 길
웃어도 보고 울어도 봤다 갈림길에서
청룡만세 백호만세 천하장사 만만세
천하장사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