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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플랑 Oct 24. 2021

조선 최고의 거상

고등학생 때 얻은 별명이 하나 있다. ‘조선 최고의 거상’이 바로 그것이다. 공부 욕심이 많아서 언어도, 수학도, 영어도, 과학도 오늘 다 공부하려다 보니 가방이며 보조가방이며 미어  터지도록 문제집과 교과서를 담아 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아직도 고등학생 때 친구들은 종종 나를 ‘거상’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운동할 시간이 따로 없었으니 체력 단련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나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공부 욕심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볼래도 남지 않은 인턴 생활 중에도 이 거상 기질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 그 흔적은 나의 주머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소에는 주머니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지만, 가운을 갈아입는 날에는 주머니 안에 든 것들을 다 꺼내야 하기 때문에 새삼 놀라게 된다. 이런 것들도 들고 다녔다니.


 먼저 붕대 가위가 하나 있다. 정형외과에서 쓰는 가위인데, 엘라스틱 밴드(천으로 된 붕대) 뿐 아니라 거즈, 반창고 등 모든 것이 잘 잘린다. 한쪽이 뭉툭해서 환자 몸에 닿아도 다치지 않을 수 있게 생긴 것도 큰 장점이다. 소독을 하고 나서 드레싱 카트(소독용품이 담긴 카트로 보통 병동마다 하나씩 구비하고 있다.)위에 놓고 오는 경우가 많아서 이름을 적어 두는 것은 필수다. 이름만 적어 두면 신기하게도 돌고 돌아 다시 내게 온다.

 일회용 장갑 두 벌이 들어 있다. 6과 1/2 사이즈, 통칭 ‘육반’ 이라고 부르는 크기로 라텍스 장갑이 멸균되어 들어 있다. 소독을 할 때 사용하는데, 멸균적 으로 촥촥 펼쳐서 끼면 가끔 환자나 보호자가 ‘와, 하얀거탑 같아요. 멋있다.’ 하기도 한다. 그러면 ‘네….’하고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도대체 어디가요?’라는 생각이 든다.


 4곱하기 4 사이즈의 거즈가 하나 들어 있는데, 이것은 아마 누군가의 소독을 하고 나서 남은 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것 같다. 드레싱 카트는 병동마다 하나이기 때문에 인턴 한 명이 독점할 수는 없어서 소독할 때는 물품을 적당히 필요한 만큼 덜어서 챙겨 가곤 하는데 아마 예상보다 거즈를 덜 사용한 모양이다. 이렇게 남은 거즈는 다음 환자를 소독할 때 예기치 않게 거즈가 부족하다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또, 지혈을 하거나 관장을 하고 나서 항문을 막을 때도 사용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만능이다.


 종이 반창고도 하나 들어 있다. 병동마다 개수가 정해져 있고 환자에게 사용하고 나면 담당 간호사에게 알리게 되어 있는데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보니 이것도 언제 넣었는지 모르게 챙긴 모양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챙겨 넣는다. 간혹 종이 반창고가 모자란 병동에서는 소독을 하러 가도 소독 물품이 없어 다른 병동에서 빌려 올 때까지 한참을 멀뚱히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런 때에 이 여분의 종이 반창고가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아마도 나 같은 인턴들이 자꾸 종이 반창고를 이렇게 가져가서 병동에 반창고가 자주 부족한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든다.


 마이쮸가 두개 나온다. 하나를 얼른 까서 입에 넣는다. 어제 내과 레지던트 선생님이 고생한다고 손에 쥐어 주고 간 것이다. 와, 사과맛이다. 달큰하고 쫄깃하다. 가끔 이렇게 간식거리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동기 인턴이나 좋아하는 전공의 선생님을 만나면 주곤 하는데 이런 간식거리를 서로 주다가 눈 맞아 결혼한 수련의들이 꽤 된다는 풍문이다.


 볼펜이 잔뜩 나온다. 정말 엄청나게 나온다. 세어 보니 다섯 자루다. 볼펜 옆에 제약회사나 약 이름이 적혀 있고 몇 글자 적으면 이내 나오지 않는 싸구려 볼펜들이다. 동의서를 받을 때도, 잊어버리면 안 되는 할일을 손등에 적을 때도 꼭 필요한 물건이 바로 볼펜인데 눈만 깜짝하면 바로 잊어버린다. 스테이션에 돌아다니는 이런 싸구려 볼펜들은 따로 주인도 없다. 잊어버려도 찾을 생각도 못 한다. 지나가던 레지던트나 인턴들이 ‘볼펜 있어요?’하고 빌려 가면 그대로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 세 자루씩은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러니까 어딘가에서 굴러다니는 이런 싸구려 볼펜을 보면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것이 또 습관이 되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횡령, 소확횡인 셈이다.


 포스트잇이나 작은 쪽지에 환자 이름과 할 일(심전도 촬영, 동맥혈 채혈 등)이 적힌 것들도 몇 개 나온다. 병동에 따라 이런 할 일들을 적어 스테이션 벽 뒤에 붙여 놓으면 인턴들이 딱지처럼 떼어 가기도 하는데, 할일을 다 하고도 환자 이름이 적혀 있는 ‘환자 정보 서류’다 보니 아무 쓰레기통에나 버릴 수가 없어 주머니에 쑤셔 박은 것이다.


 작은 수첩도 하나 있다. 일기장을 들고 다닐 수 없으니 나중에라도 쓸 말이 있으면 조금씩 적으려고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열어 보니 첫 장에 좋아하는 작가의 말이 몇 줄 적혀 있다. 그 뒤로는 온통 알 수 없는 단어만 몇 개 적혀 있다. ‘뙬ㅏ유ㅠ’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딸기우유? 또아리유? 혹시…. 또라이유? ‘메디폼 두개. 메드레스 큰거’ 이건 아마도 어느 환자에게 쓴 소독용품을 간호사에게 알려 주려고 적은 것 같은데, 환자 이름을 같이 안 써놓은 것을 보니 틀림없이 말 안 해 줬을 것 같다. ‘ACS 대처’라고 멋진 제목을 달아 놓고 밑에는 온통 동그라미와 아무렇게나 죽죽 그은 선만 잔뜩 있는 페이지도 나왔다. 아마도 회진을 돌다가 교수님이 갑자기 강의를 해 주신다고 했는데, 열심히 듣는 척을 하느라고 이렇게 수첩을 열어 줄을 죽죽 그으며 고개를 끄덕인 모양이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왠지 티가 나서 교수님께서도 알아차리셨을 것 같은데…. 갑자기 수첩을 펴서 동그라미는 왜 그리고 있지, 하셨으려나….


 아무튼 이렇게 오늘도 양쪽 주머니에 온갖 만물을 다 넣고 다닌다. 지나가다가 인턴을 만난다면 아무 물건이나 달라고 해 보라. 신기하게도 그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상한 단어가 적혀 있는 수첩도 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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