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명님은 말기 유방암 환자였다. 암으로 진단받고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수술을 받지 않고 바닷가 도시로 이사해서 직업 없이 혼자 지냈다고 했다. 가족은 없었다.
더 이상 시중의 속옷으로는 커진 가슴을 가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그녀는 병원으로 다시 왔다. 수술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암은 여기 저기, 거의 전신으로 전이가 된 상태였고 수술로서 완치는 불가능했다. 항암치료가 시작되었고 통증을 줄이기 위한 진통제가 여러 종류 투약되기 시작했다. 마약성 진통제 패치도 몸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었다. 마약성 진통제의 부작용인 변비가 생기면서 원래 있던 치질과 치열이 악화되어 나중에는 자리에 편히 앉아 있기 어려울 정도로 항문 통증이 동반되었다. 척추에 전이된 암세포는 척추를 약하게 만들어 두 개나 병적 골절이 생겼고 이것 또한 굉장한 통증을 유발했다.
암 세포는 쉽게 바스라진다. 그리고 굉장한 진물이 나온다. 그녀의 유방은 이미 암세포로 뒤덮여 있고 그 암 세포들에서 끊임없이 진물이 나오고 죽은 조직이 떨어져 나왔다. 엘라스틱 밴드로 몇 겹을 감아 두어도 저녁시간이면 진물이 흘러 흥건해졌다. 인턴으로서 나의 임무는 하루 한 번 그녀에게 가서 이 유방 조직을 소독하고 흥건해진 엘라스틱 밴드를 새 것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었다. 열이 종종 났는데 그럴 때면 유방 조직에서 흐르는 진물을 채취해서 배양검사를 하기도 했다.
컨디션이 좋은 날, 통증이 이례적으로 적은 날이면 그녀는 아주 천천히 걸어서 1층 성당에 다녀온다고 했다. 낙상 주의 팻말과 스티커가 세 개나 침상에 붙어 있었고 혼자 보행해서는 안 되는 환자였는데 간호사의 눈을 피해 몰래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보호자가 없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에게 화를 내거나 다그칠 수 없었다. ‘위험하니까 이송사원님 불러서 휠체어 타고 내려갔다 오세요.’라는 내 말에 ‘검사도 아닌데 사원님을 어떻게 불러요.’ 하고 그녀가 답했다. ‘그럼 다음에 제가 한 번 모시고 갔다 올게요.’라는 말은, 왜 했던 걸까.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와, 고마워요.’ 하고 답하는 그녀의 미소가 눈이 부셨다. 통증으로 찡그린 얼굴만 보다가 웃는 모습을 보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나 우리의 산책날은 영영 오지 않았다. 뇌에 전이되었던 암세포들 때문에 며칠 뒤부터 그녀가 발작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작은 1분 미만으로 짧게 지속되었지만 항전간제 투약을 위해 몇 개의 수액이 더 연결되었고 침상 안정이 필요했다. 생체 징후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커질 것 같지 않던 유방은 놀랍게도 이제 거의 녹아 내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무서운 것을 티내지 않기 위해 나는 조금 더 무뚝뚝해졌고 3일에 한 번 가량 발작을 하던 그녀는 점점 더 기력을 잃어갔다.
신앙심이 깊은 그녀에게 병원 지하에서 천원에 파는 기도문을 몇 개 사다 드렸다. 제목은 이런 것이었다. ‘마음의 병의 치유를 위한 기도’라든지, ‘암으로부터 치유를 위한 기도’ 뭐 그런 것들. 글씨가 너무 작은 것이 신경 쓰였지만 병원 밖에 못 나가는 인턴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하루는 소독을 하러 그녀에게 갔는데, 그녀가 핏발이 선 눈을 크게 뜬 채로 몸을 옹송그리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경련 발작이 온건가, 생각했다.
“너무 아파요. 못 참겠어요.”
겨우 한 마디를 하고 그녀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저러다 눈이 빠져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이를 악 문채였다. 우선 콜벨을 눌러 담당 간호사 선생님께 환자 상태를 알리고 PRN진통제(필요시 사용할 수 있도록 주치의가 미리 처방해 놓은 진통제)가 있으면 투약이 필요할 것 같다고 알렸다. 모니터 상의 생체 징후는 혈압이 높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순간에,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뜻밖의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저, 김신명님, 손 한번만 잡겠습니다.”
그녀는 잠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런 것 밖에 없었다. 진통제 투약을 지시할 수 있는 주치의도 아니고, 암 조직을 떼어내 줄 수 있는 외과 의사도 아니고, 그녀가 몹시 의지하는 절대자도 아니다. 나는 아무도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 그녀 옆에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그래서 손을 잡았다.
손을 잡아 준 일은 그녀의 통증을 조금도 낫게 해 주지 못했다. 그녀를 구원한 것은 콜벨을 듣고 달려온 간호사 선생님이 투약한 속효성 진통제였다. 이를 너무 악물어서 저러다 치아가 부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 되었을 때 진통제가 투약되었고 조금 뒤 그녀의 통증은 진통제 덕에 조금 줄어들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손을 잡은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의 통증을 조금은 줄여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산책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과,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가는 그녀의 건강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함. 그런 것들에 몹시 아팠다. 빨리 종양내과 인턴 생활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내일 병동에 갔을 때 전날 밤 돌아가신 분이 없게 해 달라고, 매일 밤 잠에 들면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