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으면 친구가 된다
브루나이행 티켓을 사며 망설임 없이 말레이시아에서 12시간 레이오버를 선택했다. 말레이시아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카레이싱'과 '이슬람' 뿐이었다. 이 두 단어만 달랑 들고 시작한 여정이었다.
콸라룸푸르 공항에 다시 발을 내딛는 순간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콸라룸푸르 공항은 첫 인상부터 좋았었다. 말레이시아를 둘러싼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싱가폴와 같은 국가들의 허브이다 보니 이곳을 짧게 거쳐가는 비행기가 많았다. 그래서 인지 이곳은 레이오버 여행자를 위한 배려가 곳곳에 묻어났다.
잠깐이지만 편안한 콸라룸푸르 여행을 위해 나의 큰 캐리어부터 맡겨야 했다. 짐보관소도 대중교통을 타러가는 길목에 위치해 캐리어를 손쉽게 맡겼다. 손이 가벼우니 마음도 저절로 가벼워진다. 이렇게 짐보관소부터 환전소, 대중교통까지 한 줄로 이어지는 동선이 참 자연스럽게 설계된 공항이었다. KL Central까지 가는 버스와 지하철 연결도 막힘없이 스무스했다.
12시간이라는 반나절의 스탑오버 시간을 알차고 즐겁게 활용하기 위해 에어비앤비의 '로컬 푸드 헌팅' 투어를 미리 신청해두었다. 호스트와는 말레이시아의 홍대라고 불리는 ss15에서 만나기로 했다. 호스트 Afiza는 실제로 보니 사진처럼 밝은 미소를 가진 이슬람 여성이었다.
“얼마전에 남편과 한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오늘의 게스트가 한국 사람이라서 더 반가웠어요.“
한국을 좋아한다는 Afiza는 정말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우리가 만난 이곳은 대학생들로 북적이는 힙한 동네라고 했다. 대화를 나누며 우린 자연스럽게 동갑내기 친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투어 로컬푸드 헌팅이니 Afiza는 로컬 맛집에 데려가서 다양한 음식을 주문하고 나온 음식들을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한국 드라마로 이어졌다.
"한국 드라마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어요“
나는 이 친구의 말에 웃음이 났다. Afiza는 우연히 한국 드라마를 발견하고 이 언어는 뭐지? 라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어도 유창하게 사용하는 걸 보니 언어에 재능이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처음 만났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우린 오래만난 친구 같았다. 언어가 신기해 보기 시작한 한국 드라마에 어느새 푹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국 드라마의 높은 퀄리티와 완성도에 특히 놀랐다고 한다.
“한국드라마는 부자도 실제 부자처럼 보여서 몰입감이 있었어요”
말레이시아 방송국은 드라마 세트에 그 정도의 정성을 쏟지 않는다며 한국 드라마를 격하게 칭찬해 괜히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Afiza가 드라마를 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했다.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는 신혼인 이 친구는 시어머니와 자주 부딪혀 힘들었고, 한국 드라마가 그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도와줬다고 한다. 이런걸 보면 어느 나라든 고부갈등은 존재한다. 이 친구는 이런 예를 들었다.
"너는 바보야라고 하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받은 상처가 하루면 끝날 수도, 평생 갈 수도 있어요.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요."
서로 다른 문화권이지만 여성으로서 겪는 고민은 참 비슷했다. Afiza는 우리 세대가 겪는 어려움을 다음 세대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슬람 여성들의 작지만 강한 변화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Afiza는 참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결혼을 하고 집안일만 하며 하우스 와이프로 살수도 있지만 결혼하기 전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남편은 그것을 적극 지지해줬다고 한다. 스스로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에어비앤비 투어 호스트를 하며 말레이시아 음식을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일은 이 친구의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브루나이 여행에서 느꼈던 에너지와 감정을 이 친구를 만나며 또 한번 느꼈다. 모두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의 삶을 개척해 살고자 하는 멋진 여성들이 이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의 끝없었던 대화는 이 여행의 꽃이자 하이라이트였다.
12시간의 레이오버는 단순한 경유가 아니었다. 에어비앤비 투어로 만난 현지인 동갑내기 친구와의 밀도 있는 대화는 관광책과 블로그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진짜 말레이시아를 경험할 수 있게 했다. 여행이란 게 꼭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구나. 짧은 만남 속에서도 깊은 공감과 이해가 싹틀 수 있다는 걸 말레이시아의 12시간이 내게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