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은퇴의 문 앞에서〉

— 멈춘다는 건, 다른 방식으로 걷기 위함이다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요즘 나는 ‘퇴직’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린다.
그 말은 생각보다 묵직하다.
누군가에게는 휴식의 시작이겠지만,
나에게는 익숙했던 일상과의 작별을 의미했다.


오랫동안 나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다.
직장에서의 역할, 자리, 책임이
나의 존재를 대신했다.
그 이름표를 내려놓는다는 건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는 일 같았다.


“퇴직 후에는 뭐 하고 싶으세요?”
누군가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시간이 많아진다 해도,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랐다.


익숙함이 사라진 자리엔
막연한 두려움이 피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두려움 속엔 조용한 설렘도 있었다.


어쩌면 이제야
‘내가 원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길 위에서 배웠던 것들이 떠올랐다.


산은 늘 내게 말했다.
“멈춘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야.
쉬는 것도, 오름의 한 부분이지.”

그래서 나는 조금 멈춰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해야 할 일’을 향해 걸었다면,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일’을 향해 걷기로 했다.


가끔은 늦잠을 자도,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정해지기로 했다.


첫 번째 산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세우는 산이었다면,
두 번째 산은
세상 속에서 ‘나답게 사는 법’을 배우는 산이다.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다만 이번엔,
누구의 속도도 아닌,
나의 속도로 걷고 있을 뿐이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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