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난다는 건 잃는 게 아니라, 비워두는 일이다
서류철을 정리하다가,
내 이름이 적힌 명패를 바라봤다.
그동안 이 자리에서 흘려보낸 시간이
묵직한 공기처럼 어깨에 내려앉았다.
수없이 오르내린 계단,
커피 향이 가득하던 아침 회의,
서로의 안부를 묻던 동료들의 목소리.
모두 일상의 배경처럼 익숙했지만,
이제는 그 익숙함과 작별해야 했다.
‘이제 나 없이도 잘 돌아가겠지.’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여본다.
퇴근 무렵, 컴퓨터를 정리하고
보안 장치를 점검한 뒤,
조용히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매일 지나던 공간인데,
요즘은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서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하나하나 돌아보게 된다.
오랜 세월 나를 단단하게 만든 건
사실 ‘일’보다 ‘사람’이었다.
서로 기대고 다투고 웃으며 쌓아온
그 시간의 온기들이 떠올랐다.
퇴직을 준비하면서
나는 ‘비워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서류를 정리하고, 이메일을 비우고,
책상 위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렇게 비워내며 조금씩 안다.
비운다는 건 잊는 게 아니라 다시 채우기 위한 준비라는 걸.
이제는 누군가의 보고서가 아닌,
나 자신의 문장을 써야 할 시간.
누군가의 요청이 아닌,
내 마음의 방향을 따라가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요즘은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메모장에 적는다.
아침 햇살 아래 커피 한 잔,
걷고 싶은 길 하나,
쓰고 싶은 문장 하나.
그렇게 사소한 일들이
내 하루를 다시 채워가기 시작했다.
익숙함을 떠나야 새로운 익숙함이 찾아온다.
떠남이 슬프지 않은 이유는,
그 안에 다시 피어날
‘시작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