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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0월의 눈을 지나 대청봉에 서다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소공원은 새벽 4시부터 입장 가능했다.
다행히 그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입구에서 시간을 맞춰 출발을 준비했다.


4시 정각,
해드랜턴을 켜고 소공원 입구를 지났다.
아직 어둠이 짙었고
앞사람들의 발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낮에 수없이 왔던 속초지만
깜깜한 새벽의 길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두 시간이 지나 6시,
여명이 조금씩 밝아왔다.
검은 하늘이 서서히 회색으로 변하고
설악의 산줄기가 윤곽을 드러냈다.
가을 산의 색감이 하나둘 나타나면서
걸음이 자연스럽게 가벼워졌다.


희운각 대피소에 도착해
준비해 온 주먹밥을 꺼냈다.
산에서는 뭘 먹어도 다 맛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한 입 넣자마자 “꿀맛”이라는 말이 그냥 나왔다.
식사 후 다시 힘이 돌았다.


희운각에서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날 가장 놀라운 풍경을 보여줬다.
10월의 눈이었다.
바위 위에 얇게 쌓인 흰 눈을 보는 순간
“와, 진짜 눈이네…” 하고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마음은 설렜지만
발은 조금 긴장됐다.
눈이 있는 만큼
길 상태도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길은 이어졌고
가는 사람들 흐름 속에
나도 한 걸음씩 걸어갔다.


11시 50분,
드디어 대청봉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거의 12시간 만이었다.
크게 벅찰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했다.
‘여기까지 왔네.’
그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충분했다.


잠깐 머물며
하산 방향을 고민했다.
오색으로 내려갈지,
다시 소공원으로 돌아갈지.
설악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원점 회귀하세요. 그게 제일 안전해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길이 멀어도
안전하게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다시 희운각으로 내려와
대피소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설악의 가을 색감이 눈에 부드럽게 들어왔다.
조금 피곤했지만
그 풍경이 참 좋았다.


긴 하산을 마치고
소공원에 도착했을 때
오늘 하루가 꽤 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월의 첫눈으로 기억할지,
아니면 2024년의 가을 산행으로 기억될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운 좋게도
서울까지 가는 친구의 차를 얻어 탈 수 있게 되어
몸은 한결 편했다.
도움이 고마웠다.


서울로 가는 길,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한데
오늘은 네 집에 좀 있어야겠다.”


조금 놀랄 줄 알았는데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네, 그러세요.”


그 한마디가
오늘 하루의 긴 여정을 조용히 마무리해 줬다.


이렇게
2024년 설악산 제로포인트 도전은 끝이 났다.
내일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가겠지만
그 역시 자연스러운 귀가 과정이었다.


힘들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마무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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