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길 위에서 만난 우정
길고 짙은 갈색머리의 니콜은 독일 베를린 여성이다. 나와 이틀 동안 같은 방을 쓴 룸메이트 니콜은, 처음 인사를 나누는 순간 이토록 눈빛이 선량한 아가씨가 있나 싶었다. 눈빛만큼 말도, 어조도 신중하고 다정했다. 니콜이 누워 있을 때도 느끼긴 했지만, 일어나 나와 나란히 서 있을 때는 내가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려야 할 만큼 니콜은 키가 컸다. 내가 다른 호스텔에서 만난 독일 여성들과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독일인 친구 모두 키가 무척 크길래, 물어보았다. “독일 여성들은 모두 이렇게 키가 크니?” 니콜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많이 큰 거야. 평균 165cm 정도 되는데 내 키는 184cm야.” 다른 호스텔에서 만났던, 법학대학원을 마치고 서핑을 하러 온 독일 여성은 얼굴도 작고 뼈대도 가늘어 보여서 앉아 있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 적이 있다. “내가 만난 독일 여성들은 키가 아주 크던데 당신은 그렇진 않네요”라고 했더니, 피식 웃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길 하는데, 내가 일어서면 다들 놀란다”고 했다. 자신의 키는 190cm에 가깝다고 했다. 정말 그녀가 일어나고 나니 알 수 있었다. 190cm에 가깝다는 걸. 어떻게 저렇게까지 길 수 있을까. 나는 의식도 못하고 (무례하게도) 잠시나마 쳐다보며 입을 벌렸다.
네덜란드를 경유하며 올 때, 네덜란드 공항에 줄을 선 사람들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게 익숙했던 사람들과 달리, 내 앞에 선 사람들이 모두 나를 가리고 선 것 같았다. 덩치에 일단 기가 죽었다. 한국에선 나도 키가 꽤 큰 축에 속하는데 말이다. 이러니 많은 나라들을 여행해본 사람들일수록 어떤 ‘일반화’(generalization)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국경을 넘거나 어떤 지역에 들어설 때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일반적으로 달라지는 경향’을 하나의 범주로 만들어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고, 각국에서 온 많은 여행객들과 그런 일반화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아주 큰 재미거리를 제공한다.
니콜과 나눈 일반화 얘기는 이런 것이었다. 니콜은 동남아시아를 2년 동안 여행한 후 태국에서 7개월 동안 일을 한 경험이 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를 다녔는데, 자신이 만나본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좀 내성적이고 진지한 경향이 있는 반면,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사람들은 놀랍도록 외향적이고 친근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비교하면서 포르투갈 사람은 좀 내향적이고 온순한 느낌인 반면, 스페인 사람은 활기차고 친근감이 있고, 목소리가 큰 느낌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포르투갈 성향에 가깝긴 하지만, 일본인과 한국인을 놓고 보면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스페인에 가깝고 일본인은 포르투갈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얼마나 한 민족의 성향을 한데 묶어서 일반화하는 이야기들인가?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여행하는 사람들을 상당히 흥분시키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재미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니콜과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룸에서 단 둘이 있었을 때였다. 그녀는 몇 달째 포르투에서 살고 있는 중이라 했다. 독일에서 친구가 리스본으로 왔기에 친구를 보러 잠시 이곳에 머무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이번 여행을 왜 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5년 전쯤, 그러니까 30대 초반에 니콜은 15년간 사귀었던 파트너와 헤어지고, 그렇게 되면서 살던 집도 나와야 했고, 일도 그만두어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이제 남자친구도 없고, 일도 없고, 집도 없다고 생각하니 인생 망한 것 같아 절망하며 몇 시간을 울고 있었는데 홀연히 어떤 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했다. ‘이때야. 여행을 가는 거야.’ 그 전까지 니콜은 집안에 사정이 있어서 가족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이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바로 적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니콜은 삶의 활력과 열정을 되찾았다.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팔았다. 그러고선 그 돈을 가지고 무작정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물론 가족들은 미쳤다며 말렸다. 하지만 니콜은 여행 생각밖에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니콜은 부모님에게, “왜 우리는 외국에 나가서 살지 않나요? 왜 우리는 더 많은 나라로 여행을 가지 않나요? 저 나라에 가서 몇 년 살아봐요, 우리~” 이런 얘기를 무수히 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동남아시아로 떠났고, 그곳에서 2년간 여행하면서 그녀는 너무도 행복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감을 얻어 태국에서 일자리를 잡고 7개월간 일을 했다. 그녀에겐 그 시간이 자아를 찾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기간이었다.
니콜이 가장 관심을 가진 건 ‘바다’였다. 2년 전 집으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여행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올해, 그녀는 덴마크에 가서 요트를 탔다. 요트타기 자격증도 땄다. 물론 서핑도 한다. 스카이다이빙도 좋아해서 바닷속의 물고기들과 각종 생물들을 보는 게 큰 취미다. 지금 읽고 있는 책도 바다에 대한 것이고,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도 바다에 온 삶을 헌신한 <Mission Blue>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여성이다. 여행을 하면서 그녀는 더욱, 자신의 가장 큰 관심이 바다라는 것을 알아갔다.
“부럽다. 나는 여행 와서도 공부를 하는 듯한 기분인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해야 하는 삶을 오래 살아서 그런지 여행 와서도 이곳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거의 다 다녀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 나도 어떤 액티비티를 하며 활기찬 여행을 해보고 싶어.” 내가 말했더니 그녀는 친절하게 응수해주었다. “너는 예술에 열정이 있고, 나는 바다에 열정이 있는 거지. 서로 다른 분야에 열정이 있는 것뿐이야. 내 사촌동생도 여행을 가면 무조건 그곳의 거의 모든 박물관과 갤러리를 다녀. 그 애는 해변엔 안 가도 돼. 너랑 내 사촌동생이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아.” 친절하고 지혜로운 니콜….
그렇게 덴마크에 갔다가 온 곳이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에서 몇 달간 살면서 니콜은 포르투갈 어학원에도 다녔다. IT업계에서 프리랜서로 일한다는 그녀는, 이제 돈을 벌기 위해 12월이면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난 평생 이렇게 살고 싶어. 프리랜서로 돈을 벌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여행을 다니고.”
주제 사라마구 박물관에서도 그녀가 인상 깊게 본 것은 사라마구의 작업실을 재현해놓은 곳이었다. 그녀는 그 작업 공간을 ‘미니멀리즘’이라고 표현했다. 작은 책상과 타이프라이터, 책, 선반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듯한 몇 개의 미니어처들. 그녀는 그 작업실을 좋아했다.
미니멀하고도 자유로운 삶을 목표로 하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집도, 차도 중요하지 않아. 그 집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지.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일상을 살다가, 새로운 사람들과 문화를 접하고, 바다 속 자연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살 거야.”
닷새 전쯤 만난 미국인 남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살던 사람인데 올해 4월부터 유럽 여행을 시작해 북아프리카인 모로코까지 다녀왔다. 그가 구글맵에다 자신이 다녀온 지역을 표시해놓았는데, 어찌나 많은 장소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물방울 모양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어떤 연유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삶에 만족감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유럽에 살고 있던 자신의 친구가, “그러면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오라”고 했는데, 자기는 망설였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래, 그럼, 너 거기서 한 달에 600불 하는 사이클링 프로그램이나 다녀”라고 말했다. 그 순간 그는 생각했다. ‘맞아, 나는 여기 헬스장에서 이렇게 비싼 사이클링 프로그램을 다니면서 이토록 행복하지 않은데 여행을 떠나지 않을 이유는 뭐지?’라고 생각하며 결단을 하고 일단 친구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의 모험은 시작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하나 둘 버리거나 팔기 시작했고, 잠시 집에 돌아가 그가 가지고 있던 TV나 가구 등 집을 차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것들을 팔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다시 여행을 왔다. “물질은 더 이상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니콜과 똑같은 이야기였다.
60대 초반의, 반백의 머리를 뒤로 묶은 캐나다 남성은 “리조트나 호텔 가서 그 안에만 있다가 오는 그런 관광여행 말고, 현지인과 여행객을 만나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진정한 여행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까지 말했다. ‘Change the World.’ 오랜만에 들어보는걸. 난 변방에 살아서 그런지 Change the World까진 모르겠고, 나 하나 변화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나 하나 변화시키는 게 세계 변화에 먼지 한 줌만큼의 기여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여행(관광이 아닌)을 삶의 큰 일부, 삶의 핵심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적어도 내가 발견한 바로는 그렇다. 다른 여행객의 말을 매우 귀담아 듣는다는 것. 현지인들이나 현지인들의 문화를 매우 유심히 관찰한다는 것. 사람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전 지구적 토론이 일어난 마냥 자신의 이야기나 의견을 나누는 것. 그들은 길 위에서 잠시나마 인연을 맺는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라이프스타일로 살아가는 동반자이자 동료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현지인들의 문화를 새로운 자신의 삶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여행의 목표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에겐 여행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했다.
숱한 사람들이 삶을 여행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 이후, 되돌아갈 일상이라는 여행 속에서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의 말을, 어느 만큼 혼신을 다해 귀 기울이고 반응하게 될까. 얼마나 더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고 내가 사는 공간이 말하려는 것을 경청하게 될까. 어떻게 하면 더 물질에서 놓여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게 될까.
물질을 경청하는 것과 사람을 경청하는 것은 서로 대척점에 놓여 있다는 것.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런 도전적인 메시지를 나에게 던져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