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점을 둘러보았다. 너무 많은 책들이 매대에 있으면 나는 혼돈과 어지러움을 느끼곤 한다. 옛날에 대학 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을 갔을 때에도 불안과 압도감에 가까운 혼돈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다 욕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많은 책들 중에 나는 몇 권을 읽었나?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아무도 내게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으라 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내게 학자가 되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아무도 내게 이 책을 다 읽어야 인생이라는 시험에 합격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누구도 이곳에 있는 모든 책을 읽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멍청하다 못해 어리석은 욕심쟁이였다. 그때 당시의 내기준으로서는 깊고 지적인 사람이 가장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었으며, 그런 사람은 많은 책을 읽고 깊은 지식을 쌓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누구나 라이터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글을 써서 출간할 수 있는 '필자의 대중화' 시대가 오면서 지성인들은 자긍심을 상실해가고 있는 듯하다. 어찌보면 잘된 일이다. 일종의 엘리트주의라는 거대한 탑이 무너지고, 그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거만했던 사람들이 이제 밖으로 뛰쳐나와 어느 장, 어느 섬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잡아야 할지 찾아 헤매야 하는 때, 엘리트주의에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때가 왔으니.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임계점을 향해 치달아가면서 이제 노력만으로도 안 되고, 실력만으로도 안 되고, '대박'은 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감을 잡기도 어렵고, '대박'은 아니라도 '지속 가능성'도 얻기 힘든 시대, 일자리를 얻어 삶을 '시작'하기도 어려운 시대 속에서 모두가 헤매고 있는 시절인 것 같다. 사람들의 내면의 아우성이 하늘로 번져 대한민국의 하늘은 언제나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자욱한,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하늘이다.
그런 시대에 매대를 장악하고 있는 인문서는 대부분 심리학 책이었으며, 그 심리학 책들은 예전의 심리학 책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예전엔 그래도 어떤 다양성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모두가 한 방향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자존감', '나 자신의 삶을 살기', '불안에서 헤어나오는 법'. 모두 같은 주제, 다른 어휘일 뿐이다. 얼마나 눈치를 보며 살고 있으며, 얼마나 획일화된 사회 기준에서 헤어나오고 싶으면 이런 책들이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는지. 경기 불황 때문에 패션업계 쪽에서도 전혀 다양한 옷들이 나오고 있지 않다는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압박감과 도태되어 영원히 하류층으로 전락할 것 같은 불안감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혐오사회인 오늘의 대한민국 서점 매대는, 타인을 제대로 경계하면서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심리라는 한 방향 주제의 책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온종일 긴장을 풀 수 없는 사회!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만세! (이렇게 정신줄을 놓아가는구나!)
오늘 허공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강서 PC방 살인사건 가해자의 얼굴을 보았다. "억울해서 죽였어요!"
'억울함'. 그는 어쩌면 이리도 정확하게 자신의 정서를 포착했는지. 별 잘못 없는데도 가해자가 무시당한 느낌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얼굴을 30차례 이상 흉기로 찔린,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도 참 억울할 것이다. 그런데 가해자가 '억울함'을 얘기했다!?! 거의 뻑치기 수준의 이유 없는 범죄, 게다가 온라인 게임에서나 저지를 법한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가 억울함을 얘기한다!?! 그런데, 이 가해자의 억울함이 이해가 가는 것이 또 오늘 대한민국 사회의 분위기다. "나 억울해!" 가해자의 억울함은 피해자에 대한 억울함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피해자는 더더욱 억울하다.) 가해자가 토로하는 억울함은 실상, 인생에 대한 억울함, 사회에 대한 억울함, 운명과 현실에 대한 억울함이다. "인생이 억울해!"
짐승처럼 포효하는 그의 표정과 "억울해서 죽었어요!"라는 헤드카피가 어느 영화에서 본 한 장면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인생 참 억울해서, 10년 이상 우울증을 앓으며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내용을 풀어 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열심히 산 인생 더더욱 억울해서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어>(부제: 득도 에세이) 같은 제목의 글들이 그토록 오래 베스트셀러의 레드카펫 위에 서 있는 것이리라. 득도 에세이. 한국은 득도 정도는 해주어야 생존하는 나라다.
이미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젊은이들이 이와 비슷한 행진을 하고 있던 터였다. 사람이 희망이란 게 있어야 사는 법인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20대 일본 젊은이들이 피스보트를 타고 이 나라 저 나라에 정박할 때마다 거기에 머물러 살고 다시 배로 돌아오는 '희망난민'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다. 꿈을 이룰 수 없는 시대에 꿈을 강요당하는 그들은 '난민'처럼 미래 없이 하루하루 살고 있었다. 좋은 말로 '카르페 디엠'이지만, 자기성장을 포기한 '카르페 디엠'이다. 어차피 노오력해도 아무것도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 없고 발전도 없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행하기 싫다는 심리. 이 책(<희망난민>)은 한 사회학 연구자의 체험 보고서 같은 글로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바 있다.
나 역시 희망난민처럼 빛나게 '카르페 디엠'을 이루고 온 포르투갈 여행에서 돌아온 지 1주일 만에, 알지도 못하는 괴이한 사람으로부터 투척된 폭탄, 그리고 여러 가지 업무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여행에서 얻은 행복이라는 감각을 벌써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과의 소소한 잔재미, 그리고 글쓰기만이 나의 오늘을 지탱해주고 있다. 잔재미에 의미를 부여하고, 잔재미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허공을 바라보며 '억울해!' 하고 포효하지만 않을 정도면 된다. 그렇게 포효하지 않아도 될 만한 사회. 어떻게 해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소시민인 내가 그래도 뭔가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는 아직 희망을 놔버리지 않은 이상주의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