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가 수상하다. 아무래도 추석 명절 때 녀석들 둘만 남겨놓고 고향에 다녀온 게 화근이었나 보다. 사흘 일정을 이틀로 줄여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자동 급식기 하나가 고장 나 있었다. 아내 말로는 각자 자기 급식기가 있어서 오히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수컷 롱이가 굶었을 거라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밤 열두 시가 다 된 시각, 산책을 나가 녀석들이 이리저리 골목을 질주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이튿날 아침에 모모가 갑자기 다리를 절었다. 아파트 생활을 접고 단독주택으로 이사 와서 가장 신이 난 건 모모였다. 하루 종일 집 밖에 나가 놀다가 배고프면 잠깐 들어와서 먹이만 먹고 다시 밖으로 나가는 모모의 새하얀 털은 어느덧 누런 황금빛(?)으로 변해버렸지만 이름처럼 호기심이 많은 녀석의 외출을 굳이 막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둡고 음침한 곳을 좋아하는 고양이들의 습성 때문인지 가끔 골목에 주차된 자동차 밑에 들어가서 낮잠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덜컥하기도 하지만 그의 예리한 감각과 민첩한 동작을 믿는 수밖에 그것이 모모를 집에 가두어 둘 이유는 못 된다고 생각했다.
골목에는 야생으로 살아가는 고양이들이 많다. 물론 사람들이 주는 음식에 의존해 살아가는 녀석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먹이를 직접 구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동작은 민첩하기 짝이 없다. 사오 미터가 넘는 나무를 다람쥐처럼 잽싸게 기어오르기도 하고 가끔은 냇가로 몰려나가 오리를 사냥하기도 한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먹이로 어느 후미진 골목 지하실이거나 우거진 잡목 사이에서 새끼들을 기르며 살아가는 녀석들을 보며 모모는 무슨 생각을 할까?
모모는 새끼를 낳을 수 없다. 집에 데려오자마자 중성화 수술부터 했으니 비좁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지만 짐승들도 새끼 나서 먹이고 기르는 것이 사는 즐거움이고 보람일 텐데 나 좋자고 덜컥 수술부터 해버렸으니 새끼라도 한 번 낳고 수술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이따금 멍하게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커다란 눈동자 속에 아련한 슬픔이 있다.
명절이라 문을 연 병원이 많지 않아 여기저기 전화를 한 후에 멀리 떨어져 있는 24시 동물병원을 찾았다. 어려서부터 병원 소리만 들어도 구석으로 몸을 숨기는 모모이지만 다리를 못 쓰니 어쩔 수 없다. 혹시 부러지기라도 했다면 외출이고 뭐고 한동안은 포기해야 할 것 아닌가? 바둥거리는 녀석을 차에 태우고 병원에 갔더니 엑스레이 상으로는 별 이상이 없단다. 조제해 준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왔는데 엉뚱한 곳에서 사달이 났다.
병원에서 받아 온 약을 먹이려면 부득이하게 녀석의 입을 억지로 벌릴 수밖에 없는데 캡슐을 한 번에 집어넣지 못하고 여러 차례 실수를 반복하다 보니 무리하게 힘이 들어가게 되고 그때마다 모모는 더 발버둥을 쳤다. 어렵게 약을 먹이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이번에는 모모의 태도가 문제였다. 슬금슬금 집 밖으로 나가더니 하루 종일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동네를 몇 바퀴 돌아봐도, 예전 같으면 손뼉만 살짝 쳐도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던 녀석이 아무리 큰소리로 이름을 불러도 나타나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서야 녀석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지만 사료는 물론이고 그 좋아하는 간식도 먹는 둥 마는 둥 침대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아픈 다리는 좀 나아진 것 같으나 아무래도 마음의 상처가 컸나 보다. 생각해보니 명절이랍시고 이틀 동안이나 죄 없는 녀석을 감금하고, 강제로 병원에 후송하고, 억지로 입을 벌려 약을 먹였으니 어찌 이런 행동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겠는가? 장거리 여행과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까 봐 집에 두고 간 거고, 절뚝거리며 세 발로 걷는 게 안쓰러워 병원에 데려 간 거고, 어서 빨리 나으라고 약을 먹인 것이 오히려 거대한 폭력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쌓아온 정이며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 문득 사람의 사랑도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 할 텐데 이제 연휴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201710 hyunhae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