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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Oct 18. 2017

숙종이 사랑한 고양이, 금묘의 무덤을 찾아서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8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등재일은 2009년 6월 30일이다.

서오릉 하면 대학시절에 MT 갔던 기억 밖에는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다. 그땐 사실 어렴풋이 왕릉이라는 정도만 알았지 오릉이 무엇인지 누구의 능인지도 몰랐다. 솔직히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냥 친구들이랑 웃고 떠들며 술 마시기에 바빴던 시절이었으니까.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곳 서오릉을 다시 찾았다. 대한민국 사적 198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조선 왕실의 왕릉 군으로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명릉(明陵), 홍릉(弘陵)의 다섯 능과 순창원, 수경원, 대빈묘를 포함하고 있다.


경릉(敬陵)은 1457년(세조 3)과 1504년(연산군 10)에 각각 조성된 것으로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와 정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능이다. 의경세자는 후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되었으며 본래는 의묘(懿墓)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470년(성종 1)에  경릉(敬陵)으로 고쳐 불렀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특이한 것은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능이 덕종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인데 원칙적으로는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왕, 오른쪽 언덕이 왕비의 능이지만, 경릉은 오른쪽 언덕에 덕종을, 왼쪽 언덕에 소혜왕후(인수대비)를 모셨다. 이는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소혜왕후(인수대비)는 대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분에 맞게 능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경릉. 경릉은 1457년(세조 3)과 1504년(연산군 10)에 각각 조성된 것으로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와 정비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능이다.

창릉(昌陵)은 1470년(성종 1)과 1499년(연산군 5)에 각각 조성된 것으로, 조선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예종, 오른쪽 언덕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익릉(翼陵)은 1681년(숙종 7)에 조성된 것으로 조선 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단릉이다. 익릉의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에서 유일하게 익랑이 설치되어 있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의 석물 조각은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인경왕후 김 씨는 1671년(현종 1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674년에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과의 사이에 두 공주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으며 1680년(숙종 6), 20세의 나이에 천연두로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명릉(明陵)은 1701년(숙종 27), 1720년(경종 즉위), 1757년(영조 33)에 각각 조성되었으며 조선 19대 숙종과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 민씨,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같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알려져 있으나, <공릉 숲 이야기>를 쓴 문화해설사 한성희 씨의 주장에 따르면, 왕과 왕비의 쌍릉에 왕비 하나의 능을 더 만들어 동원이강릉이라고 하는 형식의 왕릉은 조선왕릉 장법에 없다고 한다. 본래 인원왕후의 능은 명릉 서쪽에 따로 조성되었어야 하나 당시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죽어 홍릉 조성공사가 한창이던 때라 백성들의 부역을 줄이고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숙종 능침 오른쪽 언덕에 부장(附葬)했던 것이다.

명릉(明陵) I 조선 19대 숙종과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 민씨,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홍릉은 1757년(영조 33)에 조성된 것으로 조선 21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잡아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고 석물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배치하였으나 막상 죽어서는 정성왕후 곁에 묻히지 못하고 동구릉에 있는 효종의 파묘 자리에 묻혔다.


다섯 개의 왕릉 외에도 서오릉에는 순창원(順昌園)과 수경원(綏慶園),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순창원은 명종의 장자인 순회 세자(順懷世子)와 공회빈 윤씨의 묘이며, 수경원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묘로 본래 연세대학교 안에 있던 것을 1970년에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대빈묘(大嬪墓)는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의 묘로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196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매표소 옆에 위치한 역사문화관에 들러 조선 왕릉의 조성 방법 등을 영상으로 감상한 후 명릉, 익릉, 창릉, 홍릉, 경릉을 차례로 돌아봤다. 각 능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답게 잘 정비되어 있었고 안내판도 각 능의 특징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명릉에서 만난 문화해설사의 설명도 훌륭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궁금해하는 이야기의 정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서오릉에는 다섯 개의 능과 두 개의 원, 그리고 하나의 묘가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무덤이 더 추가되었어야 마땅하다. 금묘원(金猫園), 또는 금손묘(金孫墓)로 불렸어야 할 이 무덤의 주인공은 숙종이 사랑했던 고양이 금묘(金猫)이다. 비록 왕이나 왕비의 서열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왕자나 후궁의 지위에 견주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재위 기간 46년,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금묘는 숙종이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였는지 모른다. 


어느날 금묘는 수라간에서 임금의 고기를 훔쳐먹었다는 누명을 쓰고 도성 밖 절간으로 유배 되는데 궁중에서 귀한 음식 먹으며 자란 몸이 하루아침에 절간의 거친 음식을 먹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 후 숙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금묘는 식음을 전폐한 채 슬피 우니 이 소식을 들은 혜순대비가 금묘를 가엾게 여겨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금묘는 궁궐의 좋은 음식도 마다한 채 숙종의 시신이 모셔진 빈전 뜰에 머리를 조아리며 몇날 며칠을 슬피 울다가 피골이 상접한 채로 숨을 거두었다. 


이 금묘 이야기는 이하곤의 『두타초(頭陀草)』, 김시민의 『동포집(東圃集)』,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 기록되어 전하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금묘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숙종이 승하하자 죽음으로써 은혜를 갚은, 보은의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승정원일기』 에도 “숙종대왕께서 고양이를 대하고는 우(禹) 임금이 죄인을 보고 우셨던 어짊을 본받아 금손(金孫)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셨으니 은택이 금수에 미치도록 힘쓴 것이었습니다.”라는 간단한 언급이 있다. 


숙종의 제 2계비 인원왕후(혜순대비)는 금묘가 죽자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히고 수레에 실어 명릉 근처에 장사 지내게 하였다. 물론 이 금묘 이야기는 사실보다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다. 특히 숙종조 이후로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강력한 왕권 확립을 위해 의도적으로 충과 의를 강조한 이 같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숙종이 유난히 금묘를 사랑했으며, 금묘 역시 누구보다 숙종을 잘 따랐고 죽은 후에 숙종의 능 근처 어딘가에 묻힌 것만큼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하찮은 미물이지만 조선 최초의 퍼스트 캣으로 인구에 회자되어온 금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서오릉에 가면 정성왕후 곁에 무덤자리를 마련해 놓고도 끝내 그 곁에 묻히지 못한 영조의 이야기도 있고, 또 정성왕후와 쌍 초상이 나는 바람에 새로운 능을 조성하지 못하고 엉겁결에 명릉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인원왕후의 이야기도 있고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들이 많지만 거기에 금묘에 이야기가 더해진다면 서오릉은 더욱더 살아있는 왕릉으로 관람객들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금묘의 무덤은 아니더라도 명릉 근처 양지바른 언덕 어디쯤에 조그만 비석이라도 하나 세워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그 빗돌 뒷면에는  금묘의 충성스런 마음을 노래한 김시민의 「금묘가」를 새기는 게 좋겠다.


변상벽의 국정추묘(菊庭秋猫, 국화 핀 뜰 안의 가을 고양이), 간송미술관 소장.

금묘가 [金猫歌]     


궁중에 황금빛 고양이 있었으니 [宮中有猫黃金色]

임금께서 사랑하시어 아름다운 이름 지어주셨네 [至尊愛之嘉名錫]

금묘야, 하고 부르면 문득 나타나니 [呼以金猫猫輒至]

눈 깜짝할 사이에 말 알아듣는 듯 [指顧之間如有識]

기린 공작도 오히려 멀리하셨건만 [麒麟孔雀尙疎遠]

금묘는 홀로 임금 곁에서 좋은 음식 먹으며 자랐네 [金猫獨近侍玉食]

낮에는 한가로이 섬돌 위에서 낯을 씻고 [晝靜洗面螭陛頭]

밤에 추우면 임금 머리맡에서 몸을 웅크렸네 [夜寒做圓龍床側]

궁녀들 감히 손대지 못하게 하였으나 [姬嬙不敢狎而馴]

임금의 손길만은 받아들여 온몸에 은택이 두루 미쳤네 [御手撫摩偏恩澤]

하루아침에 죄를 지었으나 금묘의 죄 아닌 것을 [一朝得罪非其罪]

궁인들이 전례대로 절간으로 귀양 보내니 [宮人告例僧寺謫]

궁궐에서 태어나 귀한 음식 먹으며 자란 몸 [生來紫闕參臠身]

절간에서 목어(木魚) 죽 먹는 처량한 신세되고 말았네 [憔悴山房木魚粥]

임금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이 당도하자 [龍飛鼎湖消息至]

금묘는 먹지 않고 삼일을 통곡하였네 [金猫不食三日哭]

혜순대비께서 이 소식을 듣고 측은히 여겨 [慈聖聞此惻然感]

즉일로 사면하여 궁궐로 불러들이라 명하니 [卽日放赦還歸促]

궁궐의 물색이 예와 다름인가 [蓬萊物色異昔時]

금묘는 궁문에 들어서자 슬피 울며 내달렸네 [猫兮入門悲蹙蹴]

일찍이 경험한 일을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지 [人之嘗試胡不諒]

음식에 뜻이 없는데 고기인들 먹겠는가? [飯旣無心况復肉]

안절부절 슬피 울며 빈전(殯殿) 뜰로 달려가서 [遑遑走哭殯殿庭]

머리 들어 빈전 보며 자주 몸 구부리니 [仰首向殿頻跼蹐]

그 소리 몹시 슬퍼 차마 듣지 못하고 [其聲甚哀不忍聞]

보는 사람들 하나같이 눈물로 옷깃 적셨네 [觀者人人淚自滴] 

스무날을 하루같이 울다 지쳐 죽으니 [一哭二旬仍以死]

앙상하게 야윈 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네 [骨見寒毛尤慘目]

비단으로 머리 감싸 수레에 실어 묻어주니 [錦以首輦而葬]

그 묻힌 곳, 명릉(明陵) 지척이라네 [埋處明陵是咫尺]

오호라, 금묘의 이야기 천고에 드무니 [嗚呼此事罕千古]

옛날 송나라 때 도화견의 환생인가? [古有桃花今繼躅]

임금께 받은 사랑, 죽음으로 보답하였네 [啣仁戀澤死報主]

기이하도다. 털 달린 족속에게도 충신이 있으니 [異哉忠臣在毛族]

미물이 어찌하여 그럴 수 있는가? [微物如何乃能然] 

이는 모두 우리 임금의 덕이 짐승에게까지 미친 것이니 [總是吾王及獸德]

말세 사람들 금묘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 末世人多愧玆猫]

은혜 저버리고 의리 망각하는 난신적자(亂臣賊子) 되지 마소 [背恩忘義爲亂賊]

말 전하노니, 조정의 사관(史官)들이여 [寄語蘭臺秉筆人]

부디 금묘의 이야기 실록에 적어 널리 알려주시오 [金猫特褒書實錄]    

      

서오릉에서는 하루에 세 번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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