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앵이가 새끼를 낳았다. 그것도 무려 일곱 마리씩이나.... 여섯째는 출산 중에 하늘나라로 갔다. 부활절에 출산했으니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새끼들은 무럭무럭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작은 체구의 어미가 여섯 마리나 되는 새끼들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지극한 모성애에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진다. 집 밖 어디, 야생에서 출산했으면 벌써 서너 마리는 저 세상으로 갔을지 모른다. 길고양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하는 말이다. 새끼들이 안전하게 잘 자라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왠지 새끼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미가 안쓰럽다.
앵앵이가 우리 가족과 인연을 맺은 건 지난여름부터다.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주차장 근처를 떠돌던 녀석을 보다 못해 아내가 먹이를 가져다준 것이 인연이 됐다. 녀석은 우리 집 고양이, 롱이 모모를 피해 앞집 현관 출입구 지붕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서는 우리 집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렇게 얼마간을 지내다가 겨울이 시작될 무렵, 슬쩍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몰래 집안으로 들어와 계단 아래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쫓아내려고 몇 차례 시도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롱이 모모가 집 밖을 자유로이 드나들어 현관문을 늘 열어놓고 지내는 까닭에 녀석의 무단 침입(?)을 막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고분고분하기나 하면 좋으련만 사납기는 그야말로 맹수 저리 가라이다. 옛날 어른들 말씀에 고양이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밥 주는 사람도 몰라보고 툭하면 물고 할퀴기 일쑤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나중에는 아예 우리 집 고양이를 쫓아내려고 덤벼들었다. 모모는 그렇다 쳐도 롱이는 앵앵이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데도 녀석 앞에만 서면 늘 고양이 앞에 쥐 신세다.
그래도 어쩌랴? 날은 추워지고 더구나 수컷인 줄 알았던 녀석을, 발정기가 돼서야 암컷인 줄 알게 됐는데 떡하니 임신까지 했으니 하는 수 없이 출입문 옆 베란다를 치우고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족히 한 평이 넘는 공간인 데다 사람의 출입도 적고, 더구나 2층이어서 전망까지 좋으니 앵앵이도 퍽이나 만족하는 눈치였다.
출산이 다가오면서 앵앵이의 몸도 하루가 다르게 불어갔다. 배가 남산만큼 커진 것을 보고 새끼가 한 열 마리쯤 들어있을 것 같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정말로 일곱 마리나 되는 새끼들을 줄줄이 낳을 줄은 생각 못했다. 부활절 전날 밤, 아내는 밤새 앵앵이 곁을 지키며 새끼들을 받아냈다. 넷째까지는 비교적 순산이었으나 이후 기운이 다한 앵앵이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나머지 셋을 더 낳았다. 그 와중에 여섯째는 사산이 되고 말았다.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꼬박 밤을 새우며 산파 노릇을 해서인지 지금도 우리 식구들 중 유일하게 앵앵이의 몸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는 사람은 아내뿐이다.
아침 출근길에, 옹기종기 서로 몸을 의지한 채 체온을 나누고 있는 새끼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앵앵이 소식을 알고 있는 지인들은 만날 때마다 녀석들을 다 어찌 키우느냐고, 대폭 늘어날 식비며 병원비를 어찌 다 감당하느냐고 걱정들이지만,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그 순수한 영혼들을 대할 때만큼은 이상하게도 그 같은 세속적인 걱정 따위는 들지 않는다. 얼마 전 어버이날 기념 대통령 표창을 받은 수상자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병든 남편과 친정아버지 간병에 가족들 생계며 자식들 교육까지 책임지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으련만, 수상자는 “살다 보니까 살아지더라고요.”하며 별것도 아닌 일로 상을 받게 되었다고 겸연쩍어했다. 나는, 수상자의 말이 꼭 ‘살고자 하면 살고, 죽고자 하면 죽는다.’와 같은 말로 들린다. 고양이가 열 마리든 스무 마리든 어떻게든 살릴 생각을 하면 또한 살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