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 인문기행 20
일주일 만에 화엄사를 다시 찾았다. 새벽같이 노고단에 오르느라 각황전과 동서 5층 석탑만 살짝 둘러보고 발걸음을 돌린 것이 못내 아쉬워서였다. 특히 이른바 효대(孝臺)라고 불리는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과 ‘석등(石燈)’의 존재를 알고 나서는 하루라도 빨리 화엄사를 다시 찾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국보 35호인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은 통일신라 전성기인 8C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는 걸작이다. 화엄사 창건자인 연기조사의 아름다운 ‘효(孝)’ 이야기로도 유명한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1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새겼으며, 2층 기단은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부를 떠받치고 있다. 이 사자들 사이에 합장하고 서있는 스님상이 곧 연기조사의 어머니이며, 바로 앞 석등 하단부에 탑을 향해 꿇어앉은 채 차를 공양하는 스님상은 연기조사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조선 성종 18년(1487), 남효온이 쓴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 수록되어 있다.
밥을 먹은 뒤에 내려와서 황둔사(黃芚寺)를 구경하였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사(花嚴寺)로, 명승(名僧) 연기(緣起)가 창건한 것이다. 절의 양쪽은 모두 대나무 숲이었다. 절 뒤에 금당(金堂)이 있고, 금당 뒤에 탑전(塔殿)이 있는데, 전각이 몹시 밝고 산뜻하였다. 차 꽃과 큰 대나무와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그 곁을 에워싸고 있었다.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니 긴 시내가 가로로 걸쳐 있는데, 그 아래가 웅연(熊淵)이다. 뜰 가운데에 석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 부인(婦人)이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는 형상이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구니가 된 연기의 어머니입니다.” 하였다. 그 앞에 또 작은 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또한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한 남자가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며 탑을 떠받치고 있는 부인을 우러러 향하고 있는 형상이 있으니, 이것이 연기이다. 연기는 옛날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서 절을 세웠다. 제자 천 명을 거느리고서 화두(話頭)를 정밀히 탐구하니, 선림(禪林)에서 조사(祖師)라고 불렀다. -남효온, 『추강선생문집 권6』 잡저(雜著),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한국고전종합DB 인용)
아침 일찍 서울 남부터미널을 출발하여 화엄사에 도착하자 어느덧 정오가 다 된 시각이다. 일주일 전에 왔을 때는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커다란 싸리비를 들고 절 마당을 쓰는 스님들 모습만 보였는데 휴일 한낮의 화엄사는 관람객들 발길로 제법 붐빈다. 먼 길 달려오느라 배가 고팠던 탓에 우선 공양간으로 달려가 식사부터 청하자 마음씨 좋은 보살님, 밥과 반찬통을 가리키며 양껏 알아서 떠먹으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늘 주는 대로만 먹다가 막상 음식을 직접 떠서 먹으려니 생각보다 양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양을 너무 많이 하면 불가(佛家)에서 경계하는 탐욕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요, 그렇다고 너무 적게 하면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니, 많음과 적음, 탐욕과 무욕의 경계는 과연 어디쯤일지? 작은 밥그릇 하나에도 부처의 도(道)가 깃들어 있다.
고요히
삶에만
머물게 하소서
하늘마저
물들이고 싶었던
욕망의 화구(火口)를 지나
아수라(阿修羅)의 계곡
선혈처럼 붉은
꽃잎 떨어지던 날
다시 눈비 맞으며
저문 밤을 지키는
고독한 나무 되게 하소서
달콤한
껍데기의
유혹 벗어던지고
저녁 안개와
흐르는 달빛
밤마다
순수의 속살 씻는
무심(無心)의 나무 되게 하소서
한 방울의 이슬에도
가슴 떨리는
어리석은 나무 되게 하소서
-현해당 시 「낙화(落花)」 전문-
계단을 올라 대웅전 앞에 서자 낯익은 현판 글씨가 눈길을 끈다. 선조(宣祖)의 아들인 의창군 광(珖)의 글씨로 서울에 있는 조계사와 진관사의 대웅전 현판은 모두 이 글씨를 모각해 쓴 것이다. 몇 해 전 진관사에 갔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막상 원본 글씨 앞에 서니 늘 마음속으로 사모하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현판 말미에는 “皇明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의창군광서)”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숭정 9년 병자(丙子)’는 서기 1636년(인조 14)이요, ‘의창군 광’은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宣祖)의 서자이다. ‘세사(歲舍)’는 ‘세재(歲在)’. ‘세차(歲次)’와 같은 뜻으로 간지(干支)를 따라서 정한 해의 차례를 말한다. 화엄사 대웅전은 오늘날 화엄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636년 벽암 각성이 중건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국보 제67호 각황전(覺皇殿)이 우뚝 서서 발아래 화엄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본래 이름은 장육전으로 장육금신(丈六金身, 석가여래의 모습만한 금색의 불상)을 안치하고 사방 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숙종 28년(1702) 계파대사가 중건했다. 이 계파대사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조선 숙종 37년(1711), 승군들을 이끌고 북한산성의 축성을 지휘했던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성능(聖能)이다. 성능은 산성 축성 후에도 약 30년간 성 내의 중흥사에 머물며 산성의 수비를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영조 21년(1745)에는 북한산성의 모든 것을 기록한 책 『북한지(北漢誌)』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 책은 도리(道里), 연혁(沿革), 산계(山谿), 성지(城池), 사실(事實), 관원(官員), 장교(將校, 궁전(宮殿),사찰(寺刹), 누관(樓觀), 교량(橋梁), 창름(倉廩), 정계(定界), 고적(古蹟) 등 14개 항목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북한산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북한도(北漢圖)’와 성능의 발문을 각각 앞뒤에 수록했다.
성능의 스승인 벽암 각성 또한 팔도도총섭으로 인조 때 남한산성 수축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인 것을 감안하면 화엄사와 팔도도총섭,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왕실과 각황전 등의 연결고리를 밝혀보는 것도 화엄사 연구의 흥미로운 한 주제가 될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각황전 중창 설화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계파선사가 각황전 중창 불사의 화주가 되었는데, 문수보살의 계시로 산문을 나선 후 처음 만난 거지노파에게 시주를 청한다. 거지노파는 계곡물에 몸을 던져 죽고 후에 숙종의 공주로 환생한다.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손이 펴지지 않던 공주는 우연히 계파선사를 만나 손이 펴지게 되는데 거기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공주의 손이 펴진 것을 기뻐한 숙종은 계파선사를 만나 각황전 중창 소식을 듣게 되고 이에 중창 비용과 ‘각황전’이라는 편액을 하사한다.
각황전을 둘러본 후 다시 효대로 향했다. 적멸보궁이라고 쓰여 있는 입간판을 따라 계단을 오르다보니 각황전 뒤꼍을 어슬렁거리는 황금빛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띈다. 각황전이 숙종과 관련된 건물이어서인지 문득 숙종이 사랑한 고양이 ‘금묘(金猫)’가 떠오른다. 궁궐에서 임금의 고기를 훔쳐 먹은 죄로 절간에 유배된 금묘는 숙종의 죽음을 알고는 식음을 전폐한 채 울부짖다 끝내 목숨을 잃고 만다. 그 금묘가 다시 환생한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자 마침내 효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게 웬 날벼락인가? 천만 뜻밖에도 효대는 공사 중이다. 탑 높이보다 더 높은 가림막에 에워싸인 채 잠시 세상과 격리된 효대, 공중부양이라도 할 수 있으면 모를까? 한주일 내내 내 마음을 지배했던 효대의 친견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준비의 부족을 자책하며 효대를 등지고 서서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멀리 구례 시가지와 주변의 너른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벌써 이십여 년 전 일인가 보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지리산을 찾은 적이 있었다. 둥근 보름달이 지리산 상봉으로 솟아오르던 그 밤은 마침 내 생일이기도 했다.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새 끄적거렸던 시 한 수를 오랜만에 다시 읊조려본다.
頭流山下彩雲垂 지리산 자락에 황혼이 드리웠는데
忽出東峰桂一枝 문득 동쪽 봉우리 위로 계수나무 한 가지 떠오르네
慈母久前行彼世 어머님 오래 전에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
次兒生日尙知之 둘째 아들의 생일을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