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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Sep 08. 2019

다시, 눈길을 걷다

이청준은 장흥이 자랑하는 소설가다. 흔히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말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여기에 덧붙여 “장흥 가서 글 자랑하지 말라.”라는 말이 나올 만큼 장흥에는 뛰어난 문인들이 많고, 그러다 보니 지역민들의 자부심도 높다. 송기숙, 한승원 등 한국현대소설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모두 장흥 출신이고 또, 이승우, 이대흠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작가들이 계속해서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등단 작가만도 120명이 넘는 장흥은 서울에서 약 400㎞ 이상 떨어진 지리적 변방이지만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변방이 아닌, 당당한 주류로서 한국문학의 한 축을 담당해나가고 있다.

장흥군 안양면에 위치한 집필실 <해산토굴>에서 창작과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는 한승원 작가가 추모사를 하고 있다.



2008년 문화부로부터 국내 유일의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된 장흥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유명 문사들을 배출해 왔다. 멀리 고려조에는 고종 ~ 충렬왕 연간의 선승이자 대 시인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가 있고, 조선조에 들어서는 「관서별곡」으로 유명한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 삼당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던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신경준 · 황윤석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실학자로 불린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한평생 벼슬자리에 뜻을 두지 않고 지조 높은 향사(鄕士)로서 몸소 안빈낙도의 삶을 실천해 보인 지지재(止止齋) 이상계(李商啓) 등이 있다. 존재 위백규는 그의 「유참봉 맹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땅이 궁벽하고 가문이 한미하며 사람이 보잘 것 없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삼벽(三僻)’이라고 칭하며 한껏 몸을 낮추었으나 그것이 어찌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으랴? 옥봉 백광홍은 최경창 ·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원감국사 이래로 전해 내려온 장흥문학의 근기를 중앙무대에 알렸고, 지지재 이상계는 그의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일찍부터 관직에 뜻을 세우지 않고 향리를 지키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으니, 예로부터 장흥은 득량만을 끼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제암산, 가지산, 사자산, 천관산 등의 명산 준봉이 솟아있고 그 사이사이로 크고 작은 곡창이 펼쳐져 있어 바다와 육지의 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는 천혜의 땅이었다. 그러니 장흥은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안빈낙도하며 음풍농월하는 은일지사의 삶을 영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땅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시가 흥하고 가사가 흥했는지도 모르겠다. 지지재 이상계는 평생 고향 땅을 떠나 본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시적 성취가 당대의 내로라하는 중앙의 문사들에 비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향리에서 살아가는 안빈낙도의 즐거움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한가한 산에서 읊다                                閒山吟

밭에 있으면 한가한 농군이 되고           在圃爲閒圃

산에 있으면 한가한 산지기 되니           在山爲閒山

세상 살아가는 이 한 몸의 신세             自家一身世

편안하고 한가하지 않는 곳이 없어라   無處不安閒

 -출전 :이병혁 『역주지지재유고(譯註止止齋遺稿)』

탐진강 I 길이 51.5㎞로 장흥읍을 관통하여 강진만으로 빠져나간다. 전남의 3대 강 중 하나다.(사진 - 장흥군청 제공)


그렇다고 장흥이 결코 현실세계와 담을 쌓은 은둔의 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장흥 역시 엄연한 역사의 한 터전이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으니 고려 이래로 끊임없는 왜구들의 침탈이 있었고, 기름진 땅이 있으니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수탈이 있었으며 이에 항거하여 들불처럼 일어난 민중들의 봉기가 있었다. 6·25를 전후해서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일부지역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게 장흥은 우리 근현대사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기도 했으니 그때마다 수많은 민초들의 피가 장흥의 산과 바다에 뿌려졌고 그 피의 뜨거움이 어쩌면 도도한 장흥문학의 밑바탕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송기숙, 한승원 등과 함께 장흥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청준은 1939년, 회진면 진목리에서 태어나 회진초등학교와 광주서중,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단편소설 「퇴원」이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당선, 소설가로 등단했으며 40여 년 간,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흰옷』, 『인간인』, 『축제』 등 17편과, 중단편 「소문의 벽」, 「이어도」, 「예언자」,  「자유의 문」,  「비화밀교」, 「병신과 머저리」, 「서편제」 등 150여 편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2017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전 34권의 전집으로 간행되었으며 『당신들의 천국』, 「예언자」 등 20여 장단편이 12개 국어 40여 권으로 번역 출판 되었고, 「서편제」, 「이어도」 등 9편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2008년, 향년 69세의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타계하여 고향 진목리 갯나들에 안장되었다.


이청준 생가. 2005년 장흥군에서 매입 후 복원했다. (사진 - 장흥군청 제공)


처음 이청준의 소설 「눈길」을 접했을 때, 사실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나이로는 작가보다 한참 아래지만 그와 동향인 나로서는 작품 속의 이야기가 곧 나 자신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 심한 거부감이 일었다. 자식에게 해준 게 없어 그저 미안한 마음뿐인 어머니와 그 어머니에게 받은 게 없으니 갚을 것도 없다는 이기적인 아들이야말로 곧 나와 내 어머니가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언제까지나 꼭꼭 감추고 싶었던 내 삶의 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서 괜히 주제가 진부하다느니, 표현이 매끄럽지 못하다느니 하며 애써 외면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이 같은 소설을 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작가는 생전에 고향과 어머니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도대체 그 빚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2018년 10월 5일 아침, 「제10회 이청준 문학제」에 참석하기 위해 장흥으로 향했다.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 인천에서 광주를 거쳐 다시 장흥으로 가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으나 작가의 지인들을 만나보고, 또 「눈길」의 배경이 된 그의 고향마을을 돌아보면 좀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나 역시 작가와 동향이기는 하지만 내 고향은 회진과는 한참 떨어진 장동면(長東面)인지라 마음만 있을 뿐 고향에 다녀가면서도 지금껏 들러보지 못했다. 광주터미널에서 장흥행 직행버스로 갈아탄 후 준비해간 자료를 이것저것 뒤져보는 사이 차는 어느덧 학동정류장을 지나 화순 · 보성을 향해 달렸다. 나주 · 영암을 거쳐서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광주 · 장흥 간을 논스톱으로 달리는 직행버스였다. 보성을 지나 2번 국도를 타고 장흥으로 향하는 동안 낯익은 고향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불과 1주일 전, 추석에 고향 땅을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중학교를 마치고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말 그대로의   고향(故鄕)이 되었다. 인천에서 대학을 나왔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서울, 인천, 안산, 서울, 부천을 떠도는 동안 어느덧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젊은 시절에는 고향이 싫었다. 어쩌다 TV에서라도 끈적끈적한 전라도 사투리가 흘러나오기라도 하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얼른 채널을 돌려버리곤 했다. 말투도 최대한 서울사람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도 나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올 때면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게 고향이 혹시 충청도가 아니냐고 묻는다. 서울사람 흉내 내려다 보니 정작 서울사람은 되지 못한 채 팔자에 없는 충청도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향의 산하도 내겐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제암산 철쭉제나 천관산 억새제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행사이지만 그럴 때도 나는 북한산이나 관악산 어느 기슭을 헤매고 다녔다. 천관산은 차치하고라도 제암산은 내 고향 장동에 있는 산인데도 한번 올라보지도 않은 채 지레 별 볼 일 없으리라고 단정해 버리고 만 것이다.


영화 <천년학> 촬영 세트장


목적지인 장흥읍에 도착하니 읍내를 관통하는 예양강은 양안(兩岸)에 설치한 시설물들이 다 물에 잠길 정도로 수위가 높아졌다. 원래도 물이 승한 곳이지만 출렁출렁 파도가 치듯 밀려가는 강물을 보노라니 문득 어린 시절 고향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장마철만 되면 강물이 범람해 못쓰게 된 땅을 개간해보겠다고 많은 돈을 빌려 제방을 쌓고 모래밭을 일궈 논으로 만들었다. 제방만 무너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부농 (富農)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남았겠지만 3,4년마다 한 번 씩 꼬박꼬박 제방이 터져나가니 그야말로 깨진 독에 물붓기로 몇 년 못 가 살림은 거덜이 나고 말았다. 한번 기울어진 가세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들만은 가르쳐야한다는 생각에 형님과 누님, 나를 모두 광주로 유학시켰으니 그 고초를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어머니의 그런 고초를 알면서도 당신의 바람대로 공부에 열중하지 못했으니 못난 자식으로서의 회한이 늘 가슴에 사무친다. 군청 회의실에서 행사를 지켜보는 중에도 계속해서 어머니 생각을 했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의 추모사를 들으면서도 또, 이청준 작가가 만년에 재직했던 순천대학교 학생들의 추모 영상을 보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줄곧 생전의 어머니 모습뿐이었다. 가벼운 뒤풀이를 마치고 호텔방에 여장을 푼 다음, 다시 소설 「눈길」을 펼쳐들었다. 창밖에는 추적추적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흥군 회진면 선학동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사진출처 페이스북 장흥이야기 이윤)


이튿날, 「제10회 이청준 문학제」 참가자들과 함께 회진면 진목리에 있는 작가의 생가를 찾았다. 장흥읍에서 한 시간 거리이니 지금이야 그리 멀다고 할 수 없으나 교통 여건이 열악했던 60,70년대 상황에 비추어 보건대 족히 한나절은 걸렸을 법한 바닷가 오지 마을이다. 영화 「천년학」 촬영지인 주막집 세트장에서 기념 촬영을 한 후 진목리 생가에 도착하니 오밀조밀 늘어선 집들 사이로 다섯 간짜리 아담한 기와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난 2005년 장흥군청에서 생가를 매입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소설 속에서 “옛날 살던 집이야, 크고 넓었제. 다섯 칸 겹집에다 앞뒤 터가 운동장이었더니라.”라고 하던 노모의 말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아 살짝 웃음이 나왔다.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작가의 사진과 저서들을 살펴본 후 잠시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문득 소설 속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광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집안 소식이 궁금하여 찾아오자 어머니는 그동안 살던 집이 남의 소유가 되어버린 사실을 숨긴 채 주인의 양해를 구해 하룻밤을 재운다. 이튿날, 새벽같이 길을 나선 모자는 때마침 내린 하얀 눈길을 걸어 차부까지 사오 리 길을 걸어간다. 차부에서 아들을 차에 태워 보낸 어머니는 아들의 발자국을 되밟으며 자식을 보살피지 못한 에미로서의 죄책감에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겄냐. 눈발이 그친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 발자국 때문에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셨겠네요.”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어머님 그 때 우시지 않았어요?”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이청준 「눈길」(문학과지성사, 2012)


소설의 결말부에 해당하는 이 대목에서, 아무 것도 받은 게 없으니 갚을 것도 없다며 애써 어머니를 외면하던 이기적인 아들은 마침내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모르긴 해도 그 참회의 눈물이 이 소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작가가 늘 주장했던 것처럼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빚 갚음이란 곧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보답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 때 어머니를 원망하고 고향을 부끄러워했던 것에 대한 참회 곧, 마음의 빚 갚음이 아니었을까? 가만히 마당가로 내려와 마을 뒷산 어디쯤에 나있을 눈길을 더듬어보았다. 비록 한때이기는 하지만 어머니를 원망하고 고향을 부끄러워했던 못난 사나이가 거기 서있었다. 그가 작가인지 나인지 아니면 제3의 누구인지, 이제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제 ‘눈길’은 더 이상 작가 이청준의 길이 아닌, 이 세상 모든 못난 자식들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걷는, 깨달음의 길, 참회의 길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득 어머니가 그리울 때, 못난 자식으로서의 죄책감에 가슴이 시릴 때, 장흥으로 달려가서 눈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청준의 묘소가 있는 갯나들과 선학동 마을을 둘러본 후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얼마 전 추석 때 고향집에 들렀다가 쓴 시 한 편을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꽃이 없어 

무화과라 부른다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퇴락한 

고향집 우물가에

무화과나무 홀로 서있네


어머니 

그 나무 아래서 

밤마다 눈물 흘리셨지   


갈수록 

쪼들리는 살림과

차곡차곡 늘어만 가는 빚


그래도 

자식들만은 

번듯하게 키우고 싶어  


궂은 일 

마다않던 어머니 

애면글면 고생하시던 어머니 


밤마다 

무화과 속살처럼 붉은 울음 

옷소매에 감추셨지


밤마다 

무화과 잎새처럼 푸른 눈물 

치마폭에 쏟으셨지


그 눈물 흘러 흘러 

새벽 강에 닿으면

흐느끼는 물소리 안개로 피어올랐지    

꽃이 없어 

무화과라 부른다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퇴락한 

고향집 우물가에

어머니 홀로 서 계시네

-拙詩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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