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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Sep 08. 2019

이곳은 달의 여인숙이자 바람의 본가이다

설악산 봉정암


“길 따라 굽어 흐르는 물, 백 개의 연못에 백 번 얼굴을 비추고, 백 번 마음을 고쳐야 열리는 山門”... 이성선 시인의 시 <봉정암 가는 길>의 첫 대목이다. 용대리 백담분소로부터 백담사, 영시암, 수렴동대피소를 거쳐 봉정암에 이르는 길은 온통 물과 바위의 나라다. 봉정암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구곡담, 수렴동, 백담으로 이름을 바꾸며 때로는 폭포가 되고, 때로는 여울이 되며, 때로는 웅덩이가 된다. 낮이면 산양과 고라니가 찾아와서 목을 축이고, 밤이면 달과 별이 그 물에 몸을 씻는다. 물빛은 어느 곳에서는 유리처럼 투명하다가 어느 곳에서는 은은한 옥색을 띠며, 또 어느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시커먼 흑룡이 여의주를 물고 뛰쳐나올 듯 검푸르다. 바위의 모양도 천차만별이다. 치마바위, 학바위, 거북바위, 책상바위, 화로바위, 사자바위, 봉황바위 등, 제 이름을 지닌 바위는 물론, 수천수만의 이름 없는 바위들도 제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기다리는 듯 각양각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폭포는 또 어떤가? 수렴동으로부터 구곡담에 이르는 계곡 곳곳에는 관음폭포, 용소폭포, 동아폭포, 쌍룡폭포, 방원폭포 등이 줄을 이어, 그 옛날 이백이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은하수 한 굽이 하늘에서 떨어지네(疑是銀河落九天)”라고 한 감탄이 절로 튀어 나올 것만 같다.

쌍룡폭포. 쌍폭(雙瀑)으로도 불리며,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왼쪽 폭포는 봉정암 쪽 구곡담계곡에서 흘러내리며, 오른쪽 폭포는 청봉골에서 흘러내린다.


4월이라 바깥세상은 이미 봄이 가득하건만 설악은 아직도 겨울이 진행형이다. 쌍룡폭포의 거대한 암벽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있고, 그 얼음 속에서 두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듯 우렁찬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지금으로부터 270여 년 전, 당시 양구현감이었던 이복원은 공무를 위해 인제에 왔다가 잠시 틈을 내어 설악산을 찾았다. 때는 조선 영조 29년(1753) 4월 15일, 현귀사(오늘날 백담분소 인근에 있던 사찰)을 출발하여 백담계곡, 수렴동, 쌍룡폭포, 사자항, 봉정암, 오세암을 거쳐 다시 현귀사로 돌아오는 2박 3일의 여정이었다. 지금이야 곳곳에 나무데크와 철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어 오르기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등산로마저 없던 터라 그야말로 바위에 미끄러지고 물에 빠지며 원숭이처럼 네 발로 기어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난코스였다. 평탄한 곳에서야 가마를 이용했다고 해도 깊은 계곡을 건너거나 깎아지른 바윗길을 지날 때는 어쩔 수 없이 제 발로 걸어야만 했기에 그 노고와 위험은 지금의 백 배 천 배에 달했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쌍룡폭포에 도달한 이복원은 단지 눈의 즐거움을 위해 목숨마저 내팽개친 자신의 무모함을 자책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야 어찌 설악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겠는가?

쌍룡폭포에서부터 봉정암 까지의 길은 더욱 험난하다. 구곡담계곡을 벗어나 봉정골로 들어서면 이전과는 달리 가파른 등산로가 펼쳐지는데 소위 말하는 깔딱고개이다. 지금까지는 오감(五感)이 폭포와 바위, 바람, 나무 등과 같은 외부 세계로 향해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해야 한다. 힘들다고 돌아갈 수도 없으니 길은 오직 하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다 보면 다리는 천근만근,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시인 이성선도 분명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깔딱고개 정상에 서서 그의 시 <봉정암>을 읊조려본다.

달의 여인숙이다

바람의 本家이다

거기 들르면 달보다 작은

동자스님이

차를 끓여 내놓는다

허공을 걸어서 오지 않은 사람은

이 암자에 신발을 벗을 수 없다

‘허공을 걸어서 오지 않은 사람은 이 암자에서 신발을 벗을 수 없다...’ 마지막 두 구절이 폐부를 찌른다. 깔딱고개를 오르노라면 굵은 땀방울과 함께 온갖 세속적 욕망과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모두 빠져나가 몸이 구름처럼 가벼워지는 것일까?

탑대에서 본 봉정암. 봉정암은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이곳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봉정암에 도착하자 얄궂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산행 중에 비를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래도 잔뜩 기대하고 왔던 보름달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크다. 종무소에 등록하고 숙소를 배정받은 다음 그 유명한 봉정암 미역국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예전 북한산의 어느 절에 갔을 때, 시래기 국이 먹음직스러워 한 그릇 가득 떴다가 입에 안 맞아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는 아주 조금만 떠서 밥과 함께 말아 먹었다. 반찬이라야 고작 오이무침 한 가지였지만 결코 산 아래의 진수성찬 못지않았다.

저녁 공양을 마친 후 탑대에 올랐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때문에 참배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탑만 홀로 우두커니 서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고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의 모습 같기도 하고, 엄혹한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불의와 맞서 싸우는 지사(志士)의 모습 같기도 하고, 불초한 제자를 엄히 꾸짖는 스승의 모습 같기도 하다. 봉정사오층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가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안치한 탑이라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흡사 거대한 바위를 뚫고 나온 듯 기단부와 바위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다. 이복원의 「설악왕환일기(雪嶽往還日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탑 앞 큰 바위에 굴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이르렀으며, 굴은 배를 매어두던 곳으로 일찍이 어떤 사람이 탑대 주변에서 조개껍질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곧 증거라 한다. 생각해보니 이 굴에 배를 맬 때쯤이면 온 나라가 다 물에 잠겨 살아남은 자가 없었을 터인데 누가 그것을 보고 전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인제 봉정암 오층 석탑. 높이 3.3m.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한 석탑으로 보물 제1832호로 지정되었다.


바닷물이 탑대 아래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혹, 설악이 온통 구름바다에 잠긴 것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배는 곧 신선의 뗏목이다. 만학천봉(萬壑千峰)이 구름바다에 잠긴 때, 한 조각 신선의 배를 타고 구만리장공을 노 저어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장쾌하다. 문득 발아래 굽어보이는 공룡능선 어느 봉우리에선가 학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숙소로 돌아와 봉정암과 관련된 글들을 이것저것 살펴보니 문득 홍태유(洪泰猷, 1672~1715)의 시 한 수가 눈에 들어온다.

躋攀眼欲暗 부여잡고 오르자 어두워지는데

峯際一菴明 봉우리 옆에 암자 하나 빛나네

火知僧去暫 화롯불 있으니 스님은 잠시 비웠고

香到佛前淸 향 피운 불전에 다가가니 정신 맑아지네

地界乾坤別 지상세계의 별천지나

登臨嶽岫平 올라오니 묏부리들 평평하게 보이는데

中宵巖壑動 한밤중에 바위와 계곡 울리니

風激海濤聲 바람이 부딪쳐 파도소리 내는구나

-「봉정암」 제3수 중 2수, 권혁진 옮김-

안타깝게도 지금은 예전의 바람소리를 듣기 어렵다. 절의 규모가 과거에 비해 많이 커졌고 건물들도 모두 새로 지어 방풍, 방음이 잘 돼 있는 탓에 일부러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옛날 선인들이 느꼈을 감흥은 맛볼 수 없다. 얼마 전, 1960년대 봉정암의 모습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비록 널빤지로 지붕을 인 초라한 건물이었으나 왠지 지금의 봉정암보다 훨씬 더 봉정암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침에 문을 열면 장엄한 구름바다가 발아래 펼쳐지고, 밤에 문을 닫고 누우면 산의 정령들이 벌이는 바람의 향연에 잠 못 이루었을, 문득 그 시절의 봉정암이 그리워진다.

1960년대 봉정암. 봉정암은 6·25동란 때 탑만 남고 당우가 모두 불타버렸으나 1960년 법련스님이 천일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채를 마련했다고 한다.


벽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인 후 깨어보니 어느덧 새벽 4시, 카메라를 챙겨들고 탑대에 오르자 시커먼 먹구름을 헤치고 보름달이 선연한 자취를 드러낸다.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잠든 시각, 텅 빈 탑대에서 달과 나와 탑이 삼자대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 가득 밀려온다. 저 달이 진리의 상징이라면 탑은 깨달음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탑대를 서성이다가 아차 하는 생각에 카메라를 꺼내 달을 향해 셔터를 누르려 하자 달은 이내 검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달은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는 것임을 깨달으며 탑대를 내려서니,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그제야 달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탑과 달. 달과 나와 탑이 삼자대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 가득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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