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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May 22. 2019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현해당의 인문기행

이성선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문득 백담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는 평이한 시어로 동양적 달관의 세계를 깊이 있게 표현해 냈다는 평을 듣는다. 외로움, 사랑, 순수, 구도(求道), 자연 등은 그의 시를 특정 짓는 키워드다. 1941년, 강원도 고성에서 출생한 시인은 대학 졸업 후 약 30여 년 간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설악산을 사랑하여 설악산 시인으로도 불렸던 그는 첫 시집 『시인의 병풍』(1974)부터 마지막 시집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2000) 까지 총 13권의 시집, 7백여 편의 시를 남긴 채, 지난 2001년, 홀연히 이승을 떠나 저세상으로 갔다. 본인의 뜻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어 백담사 계곡에 뿌려졌고, 절 앞마당에는 지인들에 의해 작은 시비(詩碑) 하나가 세워졌다.  

수심교와 금강문. 백담사는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 있으며 신라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왜 하필 백담사였을까? 또, 그의 시비에는 어떤 시가 새겨져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동서울터미널에서 용대리 행 시외버스를 타고 백담사로 향하면서 그의 시집을 다시 펼쳐들었다.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 끝에 쓸려 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시 「백담사」 전문


용대리 버스 정류소에서 하차하여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 주차장에 내리자 계곡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큰 하천이나 강이라고 해야 옳을 만큼 드넓은 계곡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어진 다리, 수심교(修心橋)를 건너 백담사 경내로 향하면서 보니 수량이 줄어 거의 바닥을 드러낸 계곡에 수 천 수만의 작은 돌탑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비록 작은 돌무더기에 불과하지만 일상에 지친 중생들이 부처님 나라에 와서 소박한 꿈 하나씩 올려두고 갔으니 그것만으로도 백담사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백담사 계곡의 돌탑들. 수심교(修心橋) 위쪽으로 수많은 돌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장관을 이룬다.


경내에 들어서니 그 명성에 비해 전각(殿閣)들은 그리 보잘 것이 없다. 하기는 창건 이래 일곱 차례나 화마를 겪었고 절터와 이름도 여러 차례 바뀌었으니 옛것이 온전히 보존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만해기념관>이 있어 아쉬움을 덜어준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만해 한용운은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05년 이곳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기념관 안에는 「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 「알 수 없어요」 등 불멸의 시를 남긴 시인으로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한 불교혁신가로서, 또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월하(月下)스님의 글씨가 가장 눈에 띈다. 


참선은 우리가 사는 세간 속에 있으니 세간을 떠나서 불법을 찾는 것은 뿔난 토끼를 찾는 것과 같다.(參禪只在世間中, 離世覓佛求兎角) 


승려로서 만해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법문이 아닐까 한다. 

만해 한용운 흉상. 백담사 경내에 있다.

<만해기념관>을 나와 금강문 앞에 서니 계곡에 연해 있는 야트막한 담장 아래로 서너 개의 시비가 눈에 띈다. 김구용, 오세영, 고은 등의 시비와 함께 이성선 시인의 시비가 잔뜩 수줍은 얼굴로 거기 서있다.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여기저기 살펴보니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인가? 글씨는 많이 마모되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보기가 어렵다. 시비에는 뜻밖에 「나 없는 세상」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나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저 물 속에는 

산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 


백담사 경내에 서있는 이성선 시인의 시비. 후면에는 시인의 약력과 함께 세운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1999년에 출간한 시집 『산시(山詩)』에 실린 연작시 서른 번째 작품이다. 시비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시를 읊조려본다.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다. 나 없는 세상...... 생전에 시인은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저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던 것일까? 영원한 자연에 비해 우리네 인간의 삶이란 찰나요 순간에 지나지 않으니, 저 흐르는 물줄기를 보매 분명 유한자로서의 비애가 느껴질 법도 하건만 그의 시에서는 오히려 깨달은 자의 여유가 묻어난다. 수심교를 돌아 나와 잠시 계곡을 따라 걸었다. 시인의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나보다.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무겁다.

농암장실(聾庵丈室). 백담사 경내에 있는 찻집이다.
용대리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백담계곡의 기암괴석들. 차를 타고 가면 결코 누리기 어려운 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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