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모래의 여자>는 '일본의 카프카'로 불리는 전후 세대 작가, 아베 코보(1924~1993)가 196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해 인간 소외, 정체성 상실 등 현대인의 고독과 사회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아베 코보는 「뉴욕 타임스」가 세계 10대 문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기도 했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현대 일본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모래의 여자>는 1963년 요미우리 문학상, 1968년 프랑스 최우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고, 1964년에는 히로시 테시가하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카데미 최우수 감독상 및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에 오른 작품이다.
<모래의 여자> 첫 페이지에 나오는 문구다. 여기서 '벌'은 '죄와 벌'의 그 '벌'(罰)을 의미한다. 아리송한 이 문장의 의미는 소설의 끄트머리에 가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나온다. 첫 문장만큼이나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기괴하고 난해하다. 괜히 일본의 '카프카'로 불리는 것이 아닌 듯하다.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벌레로 변해있던 카프카의 '변신' 만큼이나 <모래의 여자> 이야기는 황당하다. 그런데 읽다 보면 묘사와 표현이 섬세하고 자세해서 묘하게 설득된다.
주인공은 30대 남자이고, 직업은 학교 교사다. 그의 취미는 곤충채집이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질투와 경쟁, 의미 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며칠간 휴가를 내고 모래땅에 사는 '길앞잡이속'이라는 희귀한 곤충을 채집하러 떠난다. 신종 곤충 하나만 발견하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기 이름도 곤충도감에 반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해안가 모래마을로 간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일종의 인정욕구가 그에게도 작용한 듯하다.
“실제로 선생들만큼 질투의 화신에게 매달리는 존재도 드물다. 학생들은 해마다 강물처럼 자기들을 타고 흘러가는데, 선생들만 그 흐름의 밑바닥 깊이 박혀 있는 돌멩이처럼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기는 해도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를 쓰레기 같은 존재라 여기고 고독한 자학 취미에 빠지든지 아니면 타인의 일탈을 고발하는, 의심 많은 도덕군자가 된다. 자유로운 행동을 동경하는 나머지 자유로운 행동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아베 코보는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에 '만주'지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그에게 만주에서 보았던 사막이나 모래땅은 <모래의 여자>를 쓰는데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을 것이다. 모래의 물성에 대한 설명과 묘사를 읽다 보면 모래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고, 모래 언덕을 함께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막 곤충에 대한 주인공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모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모래의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인 이미지는 그에게 답답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일종의 일탈과 변화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경직되고 굳어진 자신의 마음을 모래처럼 가변적인 어떤 대상에게 몰입하면서 스트레스를 잊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다.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내내 매달려 있기만을 강요하는 현실의 답답함에 비하면 이 얼마나 신선한가. 물론 모래는 생존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정착은 과연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인가. 정착을 부득불 고집하기 때문에 저 끔찍스러운 경쟁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정착을 포기하고 모래의 유동에 몸을 맡긴다면 경쟁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사막에도 꽃은 피고 벌레와 짐승도 산다. 강한 적응력을 이용하여 경쟁권 밖으로 벗어난 생물들이다. 예컨대 그의 길앞잡이속처럼......마음속으로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그는 간혹 자기 자신이 유동을 시작한 듯한 착각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p.20)
하지만 그가 휴가철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간 해안가 모래 사구에는 기이한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고, 마치 부서져가는 벌집처럼 깊게 파인 모래 구덩이들 속에 집들이 세워져 있었다. 남자는 채집을 이어가기 위해 하룻밤 묵어갈 요량으로 숙소를 찾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계략으로 남자는 여자 혼자 사는 모래 구덩이 집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 집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치워지는 바람에 그 집에 꼼짝없이 갇히게 된 것이다.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곤충 채집을 위해 간 곳에서 오히려 자신이 곤충처럼 채집당한 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곳에서 그는 물을 배급받기 위해 매일 모래를 퍼내는 노동을 해야만 한다. 남자는 극렬하게 저항한다. 이것은 불법 감금이라고, 자신은 주민등록증도 있고, 어엿한 직업도 있고, 이런 단순노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여자는 물론 마을 주민 누구 하나 그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남자는 치밀한 계획 하에 겨우 모래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지만 마을 사람들에 의해 발각되어 다시 돌려보내진다. 이후 그는 흘러내리는 모래에 집이 파묻히지 않도록, 매일 쉬지 않고 모래를 퍼내고 또 퍼내는 기계적 노동에 동참한다. 마치 끝없이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 신화처럼 매일매일 모래를 퍼내는 삽질을 한다.
소설 속에는 온갖 비유적 표현이 가득하다. 그 표현이 참신하고 탁월하다. 스토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매일의 노동현실을 견뎌내야만 하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빗대어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떠나온 치열한 경쟁사회를 사회를 비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혹은 패전 이후 일본 사회의 전반적 무기력을 고발하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래라는 퍼내고 또 퍼내도 다시 쌓이는 인생의 굴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상과 단절되어 무의미한 노동(삽질)을 반복하는 듯한 여자와 지속적으로 탈출하려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 역시 모래집에 갇힌 듯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여자는 지금까지 자기 혼자서 그곳 생활을 견디기가 벅찼었는데, 남자가 와서 도와주니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한 집이 모래를 퍼내지 않아 붕괴되면 도미노처럼 사구에 자리 잡은 마을 전체가 붕괴되기 때문에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다고. 그래서 계속 퍼낼 수밖에 없다고 여자는 설명한다. 남자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여자의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태도를 질책하면서 당신이 "개도 아니고", 모래 구덩이에서 "자유롭게 출입하는 정도"는 큰일도 아니지 않냐고 말한다. 이에 그녀는 “밖으로 나가봐야, 딱히 할 일도 없다"라고 한다. 남자는 끊임없이 기회를 엿보며 탈출하고자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시도가 무의미해 보인다. 여자는 예전에 "끔찍하도록 걸어보았고 걷는 데 지쳤다"라는 말도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 같기도 하고 바깥세상에서 실망한 사람 같기도 하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리라는 동경도 기대도 갖고 있지 않다.
Got a one way ticket to the blues,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불러. 실제로 편도표를 손에 쥔 사람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노래하지 않는 법이다. 편도표밖에 갖고 있지 않은 인종들의 신발 뒷굽은 자갈만 밟아도 금이 갈 만큼 닳아빠져 있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그들이 노래하고 싶은 것은 왕복표 블루스다. 편도표란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맥락 없는 생활을 뜻한다. 그렇게 상처투성이 편도표를 손에 쥐고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왕복표를 거머쥘 수 있는 사람에 한한다. 그렇기에 돌아오는 표를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지 않도록, 죽어라 주식을 사고 생명보험에 들고 노동조합과 상사들에게 앞뒤가 안 맞는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다.(p.156)
여자의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모습은 억압과 속박이라는 체제에 어느새 길들여지고 적응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주어진 환경 (모래 사구)에 저항해 봤자 달라질 것이 없음을 경험으로 체득한 '학습된 무기력'을 보는 듯하다. 모래 구덩이에 지은 집에서 오랜 세월 살다 보니 '밖으로 나갈 생각도 나갈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은 창살만 없다 뿐이지 감옥에 갇힌 삶과 무엇이 다를까. 외부에서 들어온 남자의 시선으로 볼 때 여자의 그런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여자의 그런 모습이 우리네 소시민의 모습과 어느 정도는 닮아 있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마을 사람들은 물 배급으로 남자를 조종하고 위협한다. 물이 없으면 모래집에서 생존이 불가능하기에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모래 퍼내는 노동에 협조할 수밖에 없다. 물은 그에게 다른 선택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남자가 우연히 모래 속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유수 장치를 발명하게 된다. 물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것은 더 이상 마을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을을 탈출할 기회가 마침내 다가왔지만 자신이 발명한 유수 장치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쉽사리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p.227)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남자는 도망치지 않는다. 소설의 맨 첫 문장,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남자는 휴가를 떠나 사라진 7년 이후, 결국 완전 실종 처리된다. 모래 마을에 눌러앉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남자는 그토록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했던 모래 마을을 왜 떠나지 않았을까? 그가 발명한 유수장치를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작용했을 수도 있고, 함께 살게 된 여자와 정이 들었을 수도 있다. 매일 삽질을 해야 하는 모래 마을의 시스템에 어느새 여자처럼 적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유수장치로 인해 더 이상 '물'로 고통당하지 않아도 되기에 물은 더 이상 자신에게 '벌'이 될 수 없다고 느낀 걸까?
모래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그것은 모래 구덩이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가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물을 발견하게 된 이후 그는 <여전히 구멍 속에 있음에는 변함이 없는데, 마치 높은 탑 위에 올라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 모래 구덩이 밖에 있는, 자신의 직장 동료들에 대해서 <질투하는 마음 없이, 윤곽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는 과자틀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일본 고전 소설 특유의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이 없지 않지만, 밑줄 치게 만드는 탁월한 비유적 표현이 대거 등장하는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전후 작가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아베 코보'를 꼽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베 코보의 초현실주의적인 작품 분위기가 하루키의 일련의 작품들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주인공이 두고 온 사회가 상징하는 것과 해안가 모래마을의 의미, 남자가 떠날 수 있었음에도 도망치지 않은 이유, 유수장치가 의미하는 것 등 생각해 볼거리가 풍부한 작품이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 열린 소설이다. 난해하고 기이하지만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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