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고전'의 속성이 그러하듯, <노인과 바다>는 워낙 유명해서 안 읽은 사람도 읽은 듯 익숙하다.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다.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던 노인이 홀로 바다에 나가 거대한 청새치를 낚았지만, 배에 매달고 귀환하는 동안 피냄새를 맡고 몰려온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청새치의 머리와 꼬리, 뼈만 앙상하게 매단 채 사흘 만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는 그동안의 부진을 말끔히 털어내고 작가로서의 명성과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노인과 바다>가 그에게는 월척이었던 셈이고, 그 월척은 다행히 비평가들과 독자들에게 물어뜯기 지 않은 채 무사히 항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1952년에 발표한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는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다.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작품마다 그 작품을 유명하게 만든 명문장이 꼭 하나씩 있게 마련이다. <노인과 바다>에는 바로 이 문장이 있다. 평생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노인이 배 위에서 읊조리는 혼잣말,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라는 고백은 이 작품의 주제이자 핵심문장이다. 그야말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오리지널 원조격 발언이다. 도대체 노인은 어떤 사람이기에 애써 잡은 청새치를 다 물어뜯기고, 사흘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극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내 패배하지 않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 그의 서사가 궁금해진다.
노인의 이름은 '산티아고'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팔씨름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힘도 좋았고, 고기잡이 기술도 좋았던 탁월한 어부였다. 그를 따르는 소년 마놀린에게 알짜 비법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연속 84일째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 처음 사십일 동안은 소년이 함께 했지만, 사십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이 스페인어로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 '살라오'가 되었다며, 자신의 아들을 다른 배로 옮겨 타게 한다.
고기를 잡아야 할 어부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장 84일간 허탕을 치고 있다니. 이쯤 되면 진작 일선에서 은퇴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도 산티아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85일째 되는 날에도 조각배를 타고 홀로 바다로 나간다. '85'는 재수 좋은 숫자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아예 먼바다까지 진출한다. 진심으로 바다를 좋아하고, 낚시를 사랑하는 산티아고의 꺾이지 않는 마음이 엿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전체 길이 18피트(5.5미터), 무게 1500파운드(700킬로그램)의 거대한 청새치를 낚게 된다.
산티아고는 배 위에서 끊임없이 큰소리로 독백을 하고 미끼를 문 청새치에게 말을 걸고 상어에게 욕을 하면서 고단한 싸움을 이어간다. 시종일관 위트와 유머도 잊지 않는다. 그의 낙천적인 모습이 어쩌면 고독한 인생을 견디게 하는 비결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청새치와 실랑이를 벌일 때 노인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그의 옆에 소년이 없다는 점이다. 노인은 소년이 옆에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혼잣말을 무려 열두 번이나 한다.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도와줄 수도 있고, 이걸 구경할 수도 있을 텐데." 늙어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 있어서는 안 돼.
노인과 소년은 세대차이를 넘어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준다. 야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은 평소 응원하는 야구팀 이야기를 즐겨한다. 소년은 부모의 반대만 아니면 언제고 노인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싶어한다. 산티아고가 상어와의 사투를 끝내고 녹초가 된 몸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을 때,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노인의 두 손을 보고 울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노인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소년은 연거푸 엉엉 운다. 사흘간이나 노인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자 소년이 얼마나 노인을 염려하고 애타게 기다렸는지 알 수 있다. 노인에게 소년은 돌아올 이유이자 삶의 희망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노인과 바다>에는 상징과 은유가 가득하다. 바다가 상징하는 것, 청새치가 의미하는 것, 상어 떼의 습격이 말하고자 하는 것, 사투 끝에 사흘 만에 귀환하는 것, 사자 꿈을 꾼다는 것, 지친 몸을 이끌고 높은 꼭대기 허름한 집을 향해 올라가는 길 등 풍파 많은 인간의 한평생이 비유와 상징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경에 비유하기도 하고 그리스 신화에 빗대기도 하지만 해석은 각자 독자의 몫이다. 인생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했으나 고난과 역경을 만나 좌절하고 낙심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꺾이지 않는 마음, 불굴의 의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부분은 노인을 살뜰히 살피고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소년의 모습이다. 친손자와 할아버지 사이도 아니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운'을 나눠주며 세대를 뛰어넘어 소통하고 연대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 가슴 뭉클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운'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한다. 발표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고 감명을 주는 이유가 분명한 소설이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노인이 된다.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할 만큼 생산성이 떨어지는 쓸쓸한 시기가 찾아온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나이가 들면 육체는 점점 쇠락하고 파괴되어 간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는 마음, 평온하고 단단한 마음을 붙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인과 바다>는 그런 꺾이지 않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감동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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