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1975년에 발표한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대중을 호도하는 가짜 뉴스가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50년 전 독일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내용이다. 소설은 27세 젊은 여성, 카타리나 블룸이 타블로이드《차이퉁》지의 기자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쏜 뒤, 경찰에 자수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누구보다 근검절약하며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왔던 평범한 여성 카타리나가 어쩌다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상황이 벌어졌을까?
모든 것은 우연히 벌어졌다. 카타리나는 수요일 밤 댄스파티에서 처음 만난 남자 괴텐 루트비히와 사랑에 빠진다. 파티가 끝난 후 두 사람은 함께 카타리나의 아파트로 돌아와 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이 카타리나의 아파트를 급습하지만 이미 루트비히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은행강도와 살인죄 혐의로 경찰에 수배 중인 남자였다. 루트비히의 도주를 도운 공범 혐의로 카타리나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경찰서로 가게 된다. 수갑을 차진 않았지만, 30여 명의 이웃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차례 카메라 세례를 받는다. 부끄럽고 당혹스러워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비닐봉지와 부딪히면서 머리가 헝클어지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진에 찍힌다. 그 사진은 다음날 《차이퉁》의 1면 톱기사로 실린다.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아직 경찰 조사를 받기 전이고 혐의가 드러나지도 않은 상태인데 이미 신문은 '공범'과 '내연녀' 등의 용어를 써 가면서 범죄 연루를 기정사실화한다. 왠지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면이다. 유명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피의자를 포토라인 앞에 세워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게 하지 않았던가.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은 사건의 경과가 어쩐 일인지 황색 언론에 실시간으로 흘러들어 가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경찰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카타리나 블룸은 조서에 담길 표현을 놓고 경찰과 이견을 보인다. 그녀는 모든 표현을 일일이 검토했고, 조서에 기록된 문장을 하나하나 큰 소리로 읽어 달라고 요청한다. 특히 카타리나는 “신사들이 다정하게 대했다"라는 표현에 몹시 분개하면서, “치근거림 대신 다정함이라고 쓰여 있는 조서에는 절대 서명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카타리나가 수많은 남자들의 치근거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을 얼마나 반듯하고 성실하게 지켜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에 비해 황색 언론 《차이퉁》이 카타리나에 대해 보도하는 방식은 가히 충격적이다. 카타리나 주변인들과의 인터뷰를 입맛대로 모두 왜곡한다. 카타리나가 가정관리사로 일하고 있는 집의 고용주인 블로르나가 기자에게 “카타리나는 영리하고 이성적”이라고 한 표현이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라는 말로 뒤바뀌고, ‘범죄성’에 대해 일반적인 입장을 표명한 말이 “그녀가 확실히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라는 말로 만들어진다. 카타리나가 경찰 심문을 받는 이틀 동안 《차이퉁》은 그녀의 과거 사생활을 파헤치고, 주변 인물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악의적으로 과장, 왜곡하고, '가짜 뉴스'로 날조한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자극적 기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낸다.
대중의 '알 권리'와 개인의 '명예'가 충돌한다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까? 죄를 지었으니, 혹은 빌미를 제공했으니 마땅히 대가를 치르는 것이 맞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범죄 사실이 명백하게 입증되기도 전이라면 어떨까? 언론에 쏟아져 나오는 자극적 보도나 과도한 사생활 파헤치기는 명백한 인격살인이다. 멀쩡했던 한 사람의 인생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카타리나는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이틀 치의 《차이퉁》을 읽어보고 경악한다. 어떻게 심문할 때 거론된 세세한 사항을 《차이퉁》이 알게 되었는지, 게다가 어떻게 하나같이 왜곡되고 오도된 진술로 알게 되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에 대해 담당 검사는 “괴텐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대한 터라 언론의 보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녀가 '시대사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이로써 “당연히 관심을 가질 권리가 있는 여론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차이퉁》에서 연일 카타리나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들을 쏟아내자, 그녀의 아파트에는 익명의 항의 전화와 비난 우편물이 폭주한다. 함께 아파트에 들어온 볼터스하임 부인과 바이터스가 카타리나가 우편물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우편물의 대부분은 “음탕한 섹스 광고”였고, “공산주의자들의 암퇘지”라는 의미의 욕설이었다. 1975년에 발표한 소설이기에 익명의 전화와 음란 우편물로 괴롭히는 모습이지만, 오늘날은 온갖 악성 댓글과 폭탄 문자테러 등으로 '마녀사냥'을 하는 모습이 그대로 연상되는 장면이다.
가짜 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써 내려가면서 카타리나의 명예를 유린한 <차이퉁>지의 기자 퇴트게스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만났을 때, 그 기자가 보여준 저급한 행동은 그녀의 인내를 넘어서게 만들었다. 그녀는 권총을 당겨 그를 살해한다. 이 작품의 부제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언론의 폭력이 눈에 보이는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불우한 가정환경을 딛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 나갔던 카타리나를 살인자로 내 몬 불합리한 현실이 비단 1975년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상황이기만 할까? 여러모로 생각거리를 던지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작가 하인리히 뵐은 1949년부터 작품 활동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전후 독일의 피폐한 사회상을 그린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에 따르면, 뵐은 전통적이고 고답적인 독일 작가 이미지에는 부합되지 않는 작가로 '독일의 죄의식'을 작품화했고, "사람이 살 만한 나라에서 사람이 살 만한 언어를 찾는 일"이 전후 독일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보았다고 한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역시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정확한 언어로,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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